검색
  • Jung Jisuk

아우라를 벗어던진 세계의 예술적 짜임과 진리

하루 전 업데이트됨


아우라를 벗어던진 세계의 예술적 짜임과 진리

La configuration artistique et la vérité-artistique du monde déshabillé sur l’Aura

Jung Jisuk 정지숙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에서 발터 벤야민은 20세기 예술 이론을 가로지르는 유명한 개념을 창안했다. 아우라 « Aura » 다. 예를 들어 아우라는 이러한 순간들에서 피어난다: 어느 한 여름,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쉴새 없이 나타남과 사라짐을 반복하는 햇살의 파편들을 볼 때, 혹은 스페인의 화가 벨라스케스가 그린, 여전히 논쟁을 거듭하고 있는 작품, 시녀들. 벤야민은 아우라를 유일하고도 아주 먼 것이 아주 가까운 것으로 나타날 수 있는 일회적인 현상이라고 정의한다. 즉 벤야민적 의미의 예술 작품에는 곧 만져질 것만 같지만 절대 만질 수 없는 저 먼 거리에 위치한, 그러한 환영이 김처럼 서려있다. 이 애매한 수증기가 (전통적인 의미에서) 예술이라 불리는 것과 아닌 것을 판가름 하는 기준이 된다. 오로지 원본만이 가질 수 있는 아우라, 복제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이 아우라, 그것은 예술과 예술이 아닌 것을 판가름하는 유효한 단위로 더 이상 기능하지 않는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극작가, 소설가, 정치활동가이자 비미학의 저자 알랭 바디우의 표현에 따르면, 이 아우라의 표출을 위한 예술적 짜임은 적어도 오늘날의 예술적 짜임과 다른 패러다임에 속한다. 예술적 짜임이라는 개념은 바디우가 예술이라 불리는 것의 유효한 단위를 설정하기 위해 만들어낸 일종의 예술이라는 카테고리 내에 속한 여러 집합에 대한 명칭인데, 이것은 어떤 하나의 변별점이 되는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어 자신의 심급을 형성한다. 그러나 예술적 짜임은 예술의 진리, 형상화, 조성, 비극과 같은 추상적인 개념으로서 어떤 작가도, 어떤 작품으로부터도 시작되지 않는다. 즉 본질적으로 유한하게 닫혀있는 테두리 안에서, 본질적인 유한한 한계성으로 특정 지어지는 무한한 다수의 작품들이 심급 내의 모임 같은 것을 형성하여 결국 하나의 집합을 형성하는 것이다. 예술은 예술적 짜임들의 집합이다. 예술적 짜임은 과학이나 정치와 같은 다른 진리적 절차들의 짜임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예술 자체의 실존을 말하는 « 스스로의 유한성에 대한 결정적인 절차 »들이 모여 경계를 구성한다. 그런데 이때, 이 예술적 짜임들 모두가 예술적 진리를 구성하고 있다면, 예술적 진리가 무한한 짜임의 증식을 반복해 나간다면, 그 끝에, 우리는 어떤 것이 예술적 진리이고 어떤 것이 예술적 진리가 아닌지 구분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해서, 예술을 비롯해 수 많은 특유한 절차들을 가진 다른 분과들이 뒤섞인 현실 내에서 예술의 범위와, 그것을 포괄하는 더 큰 단위로서의 생활세계는 환원될 수 없는 구분단위를 가질 수 있을까? 어디까지가 예술의 영역이고 어디까지가 생활세계의 영역일까? 이러한 구분은 과연 유효할까?

아우라가 사라진 순간부터, 즉 마술적-제의적 일회적 현존성으로 동시다발적 복제성에 대한 절대적 우월성을 가지는 하나의 원본이 자신의 배타적 위치를 잃어버린 순간부터, 적어도 우리는 « 하나의 진리 » 도식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세계를 맞이했다. 진리, 즉 우리가 이해하는 한에서의 아우라 없는 세계의 성격은 다음과 같다: 진리는 다른 진리에 의해 필멸하기에 완결될 수 없으며, 상호주관적인 다수의 진리가 존재한다. 이것은 우연하게 출현하는 여기 있는 공백의 자리이다. 이 공백의 자리에 쓰여지는 것들이 이를테면 분과적인 짜임들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의 짜임 자체가 하나의 진리, 즉 예술적 짜임은 곧 예술의 진리라고 명명할 수 있게 된다.

하나의 예술적 짜임은 자신의 시대에, 그가 속한 환경에 도래하는 다양한 짜임들과 관계 지어져 있음은 분명하다. 이에 우리는 예술적 짜임들을 통해 그가 속했던 시간과 장소, 그리고 세계가 변화하는 양상에 대해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알랭 바디우가 말하듯이, 진리를 생산하는 하나의 예술과 달리 하나의 철학은 하나의 진리 범주를 만들어 내는 작업으로서, 여기 이러한 진리들이 있다라고 말할 뿐이다. 오늘날의 예술적 짜임은 오늘날의 세계에서 더 이상 아우라가 유효하지 않음을 사유한다 : 혹은 아우라가 제거된 세계의 모양새를 우리에게 예술적 진리로 제시한다. 안네 임호프(Anne Imhof)의 2017년 베니스비엔날레 독일관 단독 출품작 « 파우스트Faust »가 속한, 생활 세계와 동형화(isomorphisme)하는 예술적 짜임은 분명히 벨라스케스의 « 시녀들 » 이 속한 예술적 짜임과 확실한 변별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Image 1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는 재현 개념에 대해 고찰한 기념비적 저작 « 말과 사물 »들에서, 작품 시녀들에 대한 분석으로 그 서문을 밝혔다. (푸코의 이 논쟁적인 명명주의 기호학적 분석, 혹은 구조주의적 작품 분석은 여전히 화두에 오르고 있으며 미술사학적 관점에서 오류가 많은 분석임을 밝힌다.) 푸코는 그림 바깥과 그림 내 인물들과 사물들 사이의 관계가 구성하는 기호학적 구조를 통해 재현과 표현, 그리고 주체와 객체 간의 역학 관계가 여러 심급을 이루고 있는 일종의 닫힌 세계로서 벨라스케스의 « 시녀들 »을 해석했다. 특히나 푸코가 관심을 가진 요소는 그림 안의 거울, 왕과 왕비가 놓인 주체의 자리이다. 이 주체들은 부재함으로써 그림 내에 존재하며, 따라서 거울, 주체의 자리는 공백을 드러낸다. 푸코에 따르면, 이는 대상(실제 왕과 왕비)과 기호(그들이 투사된 거울)사이의 단절이 있음을 상징한다. 이 간극, 재현의 한계(혹은 존재와 재현된 존재 사이의 간극)가 시녀들이 속한 예술적 짜임이 말하고 있는 예술적 진리라는 것이다. 좀 더 나아가면, 이 기호학적 세계는 특정한 값으로 지정된 위치들이 구성하는 닫힌 구조를 가진 기하학적 세계다. 푸코는 시녀들이 고전주의의 에피스테메(권력-지식이 작동하는 특정 시기의 저류를 형성하는 담론 체계), 즉 고전주의라는 예술적 짜임의 변별점을 가장 잘 드러내는 작품이라고 본 것이다. 이 기호학적으로 닫힌 구조를 가지는 예술적 짜임은 심급들 내의 자리와 역학관계를 기하학적으로 지정하며, (말하자면, 변수 A는 좌표 (1,1) 위치 값을 가진다. 이때 변수 A가 무엇인지는 당연히 중요하지 않다) 생활세계는 오로지 이 지정된 위치에서 개입할 수 있으며, 주체에게 다만 거울의 자리, 왕과 왕비가 서있었을 자리에 자신을 대입해보는 그 외의 어떤 기능도 허락되지 않는다. 거울에 비친 자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공백을 드러내는 거울이 거기에 있다. 즉 그곳에는 누구에게도 귀속되지 않는 구조 만이 존재한다. 구조의 이 닫힌 완결성과 유일성이 시녀들이 속한 예술적 짜임의 변별점, 즉 아우라의 형성 조건에 해당한다. 앞서 언급했던 김처럼 존재에 껴있는 환영이란 바로 이 공백으로 현현하는 구조를 말한다.

Image 2

이제 2017년의 예술적 짜임이 어떻게 다른 변별점을 형성하는지 살펴보자. 즉 임호프의 파우스트가 어떻게 다른 예술적 짜임이 내세우는 세계의 성격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제시하는지 살펴보자. 임호프가 파우스트를 제시한 건물, 베니스비엔날레의 독일관은 나치시대 홍보관 역할을 했던 역사성과 장소성이 강하게 서려 있는 곳이다. 이 독일관은 임호프에 의해 퍼포먼스, 회화, 조각, 연극, 무용, 사운드이 교차하는 유리 철골 구조의 장소로 변모하며 오늘날의 세계의 성격과 동형화를 이룬다. 퍼포머은 정말로, 어디에나, 어느 방향에서나, 관람객들을 침입한다. 관객들의 발밑 사이 사이, 유리 칸막이로 쳐져 있는 실내, 철조망 울타리 위, 혼돈을 패턴으로 삼는 퍼포머들이 시청각적, 촉각적으로 휘젓는 동안의 시간과 공간이 임호프가 만드는 예술적 짜임이다. 이곳에서 아우라는 설 곳을 잃는다. 아니, 잃을 수 밖에 없다. 사물(퍼포머)들은 기호의 매개 없이, 직접적으로, 관람객의 바로 앞에 도래한다. 이러한 예술적 짜임은 더 이상 닿을 수 없지만 가까이 있는 아스라한 무엇인가를 제시하지 않는다. 관람객과 예술작품 사이에 놓여졌던, 사물과 기호의 단절이 형성하는 거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즉, 예술은 생활 세계의 재현물이 되기를 그만두고 생활세계와 위상학으로 동형화하는 자신을 제시한다. 다시 말해, 예술적 짜임은 이제 여기 있는 공백의 자리에서 우연하게 솟아났다가 사라지는 신기루같은 마술적 형상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현존 그 자체, 존재들이 빚고 있는 현상과 형상 그 자체가 된다. 이렇게 우리는 던졌던 질문의 의의를 잃게 된다. 이제 우리는 어떤 것이 예술적 진리인지 아닌지를 가늠할 이유가 없다. 생활세계와 예술 사이 환원될 수 없는 구분단위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우리는 위상학적으로 영원히 납작하고 무한한 세계에 산다. 예술적 짜임이, 이 세계의 성격을 예술적 진리로서 제시하고 있다.

이미지출처

IMAGE 1

https://fr.wikipedia.org/wiki/Fichier:Diego_Vel%C3%A1zquez_-_Las_Meninas.jpg

IMAGE 2

http://art.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5/15/2017051500947.html

참고 문헌

« 비미학 », 알랭 바디우, 이학사 장태순 옮김, 2010 Alain Badiou, « Petit Manuel d'inesthétique », 1998,

« 말과 사물 », 미셸 푸코, 이규현 옮김, 2012, 민음사 Michel Foucault, « Les Mots et les Choses » 1966

«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 발터 벤야민, 최성만 옮김, 2007,길 Walter Benjamin, «Das Kunstwerk im Zeitalter seiner technischen Reproduzierbarkeit », 1935

[다른 미적 수행성: 현대미술의 포스트온라인 조건, 강수미], page 3-39, 미학 예술학 연구 53권0호 한국미학예술학회, 2018년 02월


© Since 2015 Wix.com를 통해 제작된 본 홈페이지의 제작 전반에 관한 권리는 GO Yeon-Jeong에, 기타 칼럼 등은 ArtFact Project Group In Paris 각 멤버들에 귀속됩니다.

This site was designed with the
.com
website builder. Create your website today.
Start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