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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Yeon-Jeong Danielle GO

[국문] 15분 4화, 자아의 거울 Fernand Khnopff

최종 수정일: 2020년 4월 7일


자아의 거울

Yeon-Jeong Danielle GO 고연정

무의식과 같은 단어는 혹자에게는 현실과 동떨어진 개념으로 받아들여지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렴풋하게 무의식이 우리가 현재까지 습득해온 경험 – 오감을 거친 – 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겁니다. 조금 더 쉽게 생각해볼까요 ? 꿈에 대해서 말해보죠. 어떠한 사건을 겪거나, 혹은 무언가를 보거나 생각한 날 밤에 꾸는 꿈에, 그 것들이 나온 경우가 있지 않나요 ?

안녕하세요, 바로 무의식과 습득된 경험을 연결한 그 문을 작품으로 탐구한 화가, Fernand Khnoff를 만나보는 15분을 여러분과 함께할 고연정 입니다.

페르낭 크노프는 세기말적 분위기로 많이들 알고 계신 상징주의의 대표적 화가입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다수의 심볼-상징으로 이루어져 있죠. 이런 작품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우리가 알아볼 수 있는 이미지 입니다. 일상에서 접하려면 접할 수 있는 풍경과 사물들이죠. 하여, 우리에게 익숙한 이미지들에는 각자가 가지고 있는 경험과 선입견이 있기 때문에, 화가가 암시하는 의미를 해석하고자 할 때, 다소 어렵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겁니다. 또한, 그 암시하고자 하는 내용이, 화가의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 그리고 화가 자신조차 끊임없이 탐구 해야 하는 자아에 대한 내용이라면, 상당히 어렵겠죠 ?

오늘 우리가 함께 볼 작품도 그런 작품 중 하나입니다. 그의 나이 약 15살 시절, 그의 가족 소유였던 Fosset에 위치했던 여름 별장에서, 그는 야외에 나가 처음으로 풍경을 스케치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스케치 하던 풍경은, 그가 성장할수록, 현실과 단절되어 진정한 자아를 들여다 보기를 원했던 그의 고독한 영혼을 담아내기 시작합니다.

A Fosset, Sous les sapins, 1894, Huile sur toile, 65,5x44 cm, Bruxelles, musée royaux des Beaux-Arts de Belgique.

양쪽으로 늘어선 앙상하리만치 보이는 나무 기둥들은 보는 이들의 시선을 화면의 중간에 위치한 숲의 어두운 안쪽으로 이끕니다. 마치 화가의 내면 깊은 곳으로 안내하는 것 같지만, 그렇게 여기기에는 그 곳으로 들어가면 한 치 앞도 보일 것 같지 않아, 발 내딛기가 망설여지죠. 저는 화가가 말해온, ‘자아의 성전’에서 단절되고 싶어했던 그의 고독함이 본 작품에서도 암시적으로 표현이 되었다 생각합니다. 공간과 공간을 이어주는 ‘문’도 막상 닫아버리면, 내부와 외부를 단절 시켜버리는, 그런 경계에 서있는 중의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1]

양쪽의 나무들이 이루는 여기 이 길이, 소통으로 이끄는 길이 아니라, 단절로 이끄는 길로써 암시된 것은 아닐까요 ? 우리의 선입견을 잠시 내려두고, 이 작품을 풍경화가 아닌, 화가의 자화상 이라 생각해 보죠, 또는 화가를 비추는 거울이라 여기셔도 좋습니다. 대신, 화가의 외관이 아닌, 내부, 자아를 그린 자화상 – 자아를 담아낸 거울 - 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작품, 이해가 되기 시작하십니까 ?

A Fosset, L’entrée du village, 1885, Huile sur toile, 46,5x65,5cm, Collection particulière.

우울한 푸른 톤으로 그려낸 이 작은 마을의 입구는 많은 빈 공간들로 이루어져 있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황폐함을 느끼게 합니다. 오른편의 두 개의 나무 기둥 사이의 공간은 다리 밑의 뚫린 어두운 공간으로 시선을 이끕니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가 화면의 왼편에서 재현되죠. 중앙에 위치한 집과 왼편에 위치한 집 사이에 위치한 길이 보는 사람의 시선을 다시 한 번 알 수 없는 어딘가로 이끕니다. 마치 화면의 아래쪽 전체에 걸쳐진 우중충한 강물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모르는 것처럼 말이죠.

지난 12월부터 파리의 Petit Palais 에서는 Fernand Khnopff 전을 하고 있습니다. 이 곳의 상설전도 좋은 구성을 자랑하지만, 이번 페르낭 크노프 전 같은 경우는, 작가의 연대기에 따른 전시 구성이 아니라, 각 테마 별로 전시관을 구성하고, 음악과 문학과 같이 종합예술의 의미가 있었던 상징주의 전시답게 음악과 시를 작품과 함께 배치하였죠.

이 외에도, 전시장의 인테리어와 동선은 물론이고, 당시의 salon 문화를 현대적 방식으로 재구성하여 재현하는 등, 탄탄한 학술적 구조를 가지고 진행된, 보기 드물 정도의 좋은 전시였다 생각합니다. 그간, 크노프의 작품들을 개인적으로 좋아했지만, 이 전시에서 저를 가장 사로잡은 작품은 바로 이 작품이었습니다.

A Fosset, La garde qui attend, 1883, Huile sur toile, 151x175,5 cm, Francfort-sur-le-Main, Stadel Museum.

화면의 오른편에 위치한 나무기둥의 윗부분은 의도적으로 잘려있습니다. 풍경화에 등장하는 나무를 생각할 때, 우리가 가지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기둥과 위의 잎들로 이루어진 나무 말이죠. 그런 나무가 가진 연속성을 크노프는 과감히 잘라 버립니다. 심지어, 시선으로 보는 이를 인도해야 할 등장인물은 관객의 시선을 외면해 버리죠. 그리고 그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는지 우리는 명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그는 어딘가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죠. 왜일까요 ? 그 이유는 그를 둘러싼 잔디로 구성된 빈 공간의 배치 때문일 겁니다.

위로 뻗어나가서 시선을 위 쪽으로 인도해야 할 나무는 화면에서 잘려 버렸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보는 이의 시선을 아래로 끌어 당기게 되는데, 그 끌어당겨진 시선이 비정형적으로 넓은 빈 공간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순간, 시각적으로 이 등장인물이 가질 외로움에 직면하게 되는 것 입니다.

En écoutant du Schuman, 1883, Huile sur toile, 101,5x116,5cm, Bruxelles, musées royaux des Beaux-Arts de Belgique.

마지막으로, 그렇게 여러분을 관찰과 생각의 세계로 이끌, 그의 작품을 보여드리고 15분 마치려고 합니다. 아마도 많은 분들이 보셨을, En écoutant du Schuman (1883)입니다.

전형적인 부르주아 인테리어로 구성된 이 중산층의 거실 중앙에는 손으로 얼굴 전체를 가린 여자가 앉아 있습니다. 왼편에 피아노를 연주하는 손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음악을 감상 중이겠군요. 작품의 제목에서 우리는 지금 슈만의 음악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모순적으로, 알 수 없는 고요함이 이 거실 전체에 가라앉은 느낌을 받게 됩니다.

검은색과 흰색, 그리고 어두운 붉은 색으로 구성된 화면의 경직성 때문일까요 ? 중앙의 인물은, 크노프의 어머니 입니다. 가린 손으로 얼굴을 알아볼 수 없어, 그녀의 익명성이 강조되고, 이러한 표현은 화면 왼편의 피아노 연주자에게서 반복됩니다. 연주자의 몸을 화면에서 보여주지 않고, 검은 겉옷의 손목으로 살짝 나온 흰색의 셔츠가 어머니 옷과 같은 방식으로 표현이 되었죠. 이러한 흑백의 대비는 피아노 건반, 벽난로의 흰색 외관 장식과 검은 안쪽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일종의 규칙과도 같이 느껴지는 구성입니다.

이 작품은 1886년 Salon des XX에서 James Ensor의 La Musique russe와 같이 전시되었는데요, 크노프를 말하고자 할 때, 언급하지 않기는 어려운 벨기에의 상징주의 시인이자 예술비평가인 Emile Verhaeren은 이 작품에 대해 ‘나는 (이 작품에서) 알 수 없는 근엄함과 슬픔을 느낀다.’[2] 라고 표현합니다.

즉, 언뜻 보면, 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행위는 음악에 더 집중하기 위해 현실의 공간을 차단하는 행위인 동시에, 음악감상을 넘어서 지금 흐르는 음악을 통해 스스로 생각에 갇혀지는 행위이기도 한 것 입니다. 우리가 15분의 전 회 차에 서 보았던, 오딜롱 르동이 등장인물의 눈을 감겨 꿈과 무의식의 세계에 갇힘 또는 떠남을 표현했던 것과 같은 류의 기법이라 해석할 수도 있겠죠.[3]

Emile Verhaeren은 크노프에 대해 – 어쩌면 크노프의 작품세계에 대해 – ‘그는 말하지 않는 만큼 생각하며, 설명하지 않는 만큼 관찰한다.’[4] 라고 표현합니다. 크노프가 그렇다면, 우리도 구체적으로 설명된, 명확한 이미지의 작품을 그에게서 기대하기 보다는, 그의 작품을 더 들여다 보고, 많은 생각을 해주는 것이,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방법일지도 모릅니다.[5] 이렇게 여러분과 같이 관찰과 생각의 세계를 돌아다닌 15분, 오늘은 여기서 마칩니다.

 

작품 목록

Fernand Khnopff

A Fosset, Sous les sapins, 1894, Huile sur toile, 65,5x44cm, Bruxelles, musées royaux des Beaux-Arts de Belgique.

A Fosset, L’entrée du village, 1885, Huile sur toile, 46,5x65,5cm, Collection particulière.

A Fosset, La garde qui attend, 1883, Huile sur toile, 151x175,5cm, Francfort-sur-le-Main, Stadel Museum.

En écoutant du Schuman, 1883, Huile sur toile, 101,5x116,5cm, Bruxelles, musées royaux des Beaux-Arts de Belgique.

참고 문헌

[L’album de l’exposition] Fernand Khnopff, Le Maître de l’énigme, du 11 décembre 2018 au 17 mars 2019, Petit Palais, Musée des Beaux-Arts de la Ville de Paris, Novembre 2018.

[Dossier de presse] Fernand Khnopff, Le Maître de l’énigme, du 11 décembre 2018 au 17 mars 2019, Petit Palais, Musée des Beaux-Arts de la Ville de Paris, Novembre 2018.

Emile Verhaeren, Sensations d’art, Libr. Séguier, 1989.

Jeffery W. Howe, The Symbolist Art of Fernand Khnopff, UMI Research Press, 1982.

Edité et traduit par Jeffery Howe, Fernand Khnopff : Writings on Art and Artists, Chestnut Hill, Mass.: Boston College, 2016.

Maurice Tzwern, Philippe Aisinber, Tzwern-Aisinber Fine Arts, Vingt (Artistic group), Tzwern-Aisinber Fine Arts, 1989.

이미지 출처

A Fosset, Sous les sapins, 1894, Huile sur toile, 65,5x44cm, Bruxelles, musées royaux des Beaux-Arts de Belgique. et En écoutant du Schuman, 1883, Huile sur toile, 101,5x116,5cm, Bruxelles, musées royaux des Beaux-Arts de Belgique. : https://www.fine-arts-museum.be/fr/la-collection/

A Fosset, L’entrée du village, 1885, Huile sur toile, 46,5x65,5cm, Collection particulière.

: http://www.lesmardisdelart.fr/wp-content/uploads/2019/01/Khnopff-cliche%CC%81s.pdf

A Fosset, La garde qui attend, 1883, Huile sur toile, 151x175,5cm, Francfort-sur-le-Main, Stadel Museum. : https://www.spectacles-selection.com/archives/expositions/fiche_expo_F/fernand-khnopff-V/fernand-khnopff-P.html

 

[1] 사실상 포셋 위치 자체도, 벨기에 남동부와 룩셈부르크, 그리고 프랑스 북동부 일부에 걸쳐진 아르덴 지방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라는 것도, 이러한 ‘경계’의 의미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위치입니다.

[2] « je ne sais quoi d’austère et de douloureux ». (Quelques notes sur l’œuvre de Fernand Khnopff, Bruxelle, 1887, repris dans Emile Verhaeren, Ecrits sur l’art (1881-1882), Bruxellesm Editions Labor-Archives & Musée de la littérature, 1997, p. 261.)

[3] 변증법적 사고로 이해를 해보자면, 모순의 모든 사물의 발전 과정 안에 존재한다고 했을 때, 인간은 모두가 처음에는 사물의 특수한 본질에 대해 인지하는 행위가 필요합니다. 그 본질이 특수하다는 것을 알려면 다른 사물과 비교하여 얻어진 공통(보편)적인 본질이 있어야만 하죠. 즉, 보편성을 통해 특수성을 인지하는 과정 자체도 모순적입니다. 이 과정의 순서는 순환되기도 하고 도치되기도 하죠. 여기서는 슈만, 즉 음악이라는 보편적, 관람객들이 공통적을 알고 있는 것을 통해, 어머니의 자아 세계, 특수한 본질로 이끈다는 해석도 가능하리라 봅니다. (참고 : 편집부 엮음, 모순과 실천의 변증법, 지양전서 7, 지양사, 서울, 1985, p. 35.).

[4] « qui réfléchit plus qu’il ne parle, qui observe plus qu’il n’explique. ». ([Article] Fernand Khnopff, le maître de l’énigme publié le 22 février 2019 par Philippe Leclercq : http://actualites.ecoledeslettres.fr/arts/fernand-khnopff-le-maitre-de-lenigme/.).

[5] 제가 존경하는 미술사학자 중 한 명인 Daniel Arasse는 자신의 저서 Histoires de peintures에서 작품을 오랫동안 들여다 보면, 그 동안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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