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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 제리코의 <메두사 호의 뗏목>: 낭만주의 회화에 표현된 정치적 개념 의식

4월 7 업데이트됨


제리코의 <메두사 호의 뗏목>:

낭만주의 회화에 표현된 정치적 개념 의식

송현주Regina Hyunjoo SONG

19세기 낭만주의 회화는 개인의 열정과 개성의 표현을 진정한 예술의 목적이라는 개념을 토대로 예술가의 현실 주제에 대한 개입과 상상력의 시각화를 그 특징으로 뽑을 수 있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프랑스 낭만주의 시대는 새로운 감상자 계층의 형성과 미술 시장의 활성화로 인해 프랑스의 문화적 자부심이 팽배하였다. 그리고 19세기 초에 확립된 이러한 프랑스 낭만주의의 전통은 1900년경까지 지속하여 왔음을 알 수 있다.

프랑스 낭만주의 회화의 시초라고 불리는 테오드로 제리코(Théodore Géricault, 1791~1824)는 1819년 <메두사 호의 뗏목>(The Raft of the Medusa)[도판 1]을 통해 당시 정치적 사건의 시각적으로 재현하는 회화를 출품한다. 제리코의 <메두사 호의 뗏목>은 실제 사건에 기인한 작품으로서 1816년 실제 ‘메두사 호’ 침몰에 영감을 받은 제리코가 문헌 자료와 증언 기록 등을 모아 계획적으로 그린 작품으로 볼 수 있다. 당시 프랑스의 사회사적 배경과 함께 제리코가 보이는 회화적 특징을 연구함으로써, 제리코가 <메두사 호의 뗏목>을 통해 반영하고자 하였던 시대 의식을 알아볼 수 있다.

[도판 1] The Raft of the Medusa, Théodore Géricault, 1819-1819, Oil on canvas, 491cm x 716cm, Louvre, Paris.

제리코의 작품 <메두사 호의 뗏목>(The Raft of the Medusa)은 난파된 프랑스 왕실 전함 ‘메두사 호’에서 일어난 실제 사건을 재현한 작품이다. 1816년 7월 망명 프랑스 귀족 출신인 뒤루아 드 쇼마레가 지휘하던 실 전함 메두사 호가 침몰하였고, 150명의 사람이 서둘러 만든 뗏목에 의지하였다. 15일을 뗏목에서 버틴 사람 중 10명만이 구조가 되었다. 당시 코레아르와 사비니라는 2명의 생존자가 난파 당시의 일을 글로 적었고, 제리코는 이 사건에 영감을 받아 <메두사 호의 뗏목>을 그리게 된다. 그의 작품은 1819년 살롱전에 출품되었으며 현실 사건과 연관하여 극적 표현을 강조했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

특히 ‘메두사 호’ 사건은 당시 언론을 통해 보고되었을 때, 25년간 배를 탄 적 없는 선장 쇼마레가 식민지 개척을 위해 관료를 매수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사회적으로 큰 파문을 일으킨다. 제리코는 <메두사 호의 뗏목>을 통해 불안과 공포로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는 사람들의 자연에 대한 항거 모습의 표현과 더불어 정권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 작품을 나타내고자 하였다. 미술사학자 베네딕트 니컬슨(Benedict Nicolson)은 제리코가 긴 시간 동안 철저하게 사건을 조사하고 작품에 사용되는 이미지의 구성을 사전 작업을 통해 구성했다는 점을 빌어 주제적 측면에서의 <메두사 호의 뗏목>을 강조하였다.

Plan of The Raft of the Medusa at the moment of its crew's rescue.

<메두사 호의 뗏목>에 나타나는 표현적 특징을 살펴보자면, 생존자들이 열흘간의 표류 끝에 구조선을 발견하는 장면을 다룬다. 뗏목은 파도의 움직임에 따라 표현되었고, 돛은 바람에 부풀어 있다. 작품 구성은 삼각형 구도를 이루고 있으며, 왼쪽으로부터 파도가 일어 돛을 덮치는 대립적인 힘을 나타낸다. 왼쪽 아래 두 구의 시체가 미끄러져 가는 장면을 포함하여 대부분 인물이 실제 사람 크기로 거대하게 그려졌다. 인물군은 왼쪽 돛대와 지나가는 배를 향해 손을 흔드는 인물 중심으로 두 개의 피라미드를 이룬다. 또한, 중앙의 인물은 대각선 오른쪽 위로 올라가 마지막으로 오른쪽 인물이 흔드는 천에서 극적인 모습이 보인다. 작품의 구성은 장면을 극대화함으로써 뗏목의 구조 상황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세기에 발생한 비극적인 사건을 소재로 택한 제리코는 당시 사회와 예술 전반에 대두하는 자기 표현과 더불어, 정치적 사건의 시각적 구현을 나타낸다. 19세기 프랑스 낭만주의는 외국으로 망명했던 문학자들이 귀국하면서 퍼트린 문학 정신에서 비롯되었다. 특히 샤토브리앙(François René Châteaubriand, 1768-1848)의 자아에 대한 숭배는 프랑스 낭만주의의 토대를 마련한다. 낭만주의는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절대 군주의 시대가 지나고 프랑스인들의 민족적 자부심이 고양되던 시기에 형성된 사조로서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대혁명의 소산물로 볼 수 있다. 혁명 시기에 미술사에서 나타난 큰 변화 중 하나는 언론의 표출이었다. 이후 제1 제정 아래에서 엄격하게 검열되었던 언론은 루이 18세가 발표한 헌장으로 이전보다 자유로운 모습을 가지게 된다.

아놀드 하우저(Arnold Hauser, 1892-1978)에 따르면, 혁명과 낭만주의의 관계 아래 예술은 한마디로 한 개인이 다른 개인에게 자신의 의사와 감정을 전달하는 매개체가 되었다.특히 프랑스 언론의 변혁에서 <주르날 데 데바 (The Journal of Debates>)(1789)와 <콩스티튀시오넬(The Constitutional)>(1815) 등을 포함한 잡지사들은 당시 화가들과 작가들에게 지면을 내주었고, 문예란 형식으로 살롱전에 대한 평을 실을 수 있도록 하였다. 따라서 19세기 낭만주의 화가들은 당대의 정치적, 사회적 차원의 개입을 통해 직접적인 현실 수용이 가능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와 맞물려 제리코는 1814년 살롱전에 <전쟁터를 떠나는 부상당한 기갑병(Cuirassier blessé quittant le feu)[도판 2]을 출품하였다. 이 작품에서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은 당대의 패잔병으로, 작품에서는 그의 육체적 상처보다 정신적 상처를 강조한다. 제리코는 이 작품을 통해 역사화도 초상화도 아닌 당대 새로운 유형의 회화를 선도한다. 다수의 제리코의 회화를 연구한 Lorenz Eitner (1919-2009)에 따르면, <전쟁터를 떠나는 부상당한 기갑병>은 익명의 인물을 통해 당대 사건과 감정을 암시한다. 즉, 이 작품은 애국적인 표현이 담긴 역사화가 아니라 근대적 정치 개념을 한 개인에 투영시킨 작품으로서 의의가 있다. 이로부터 제리코는 현실적 사건을 작품에 반영하는 회화 기법에 관심을 두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도판 2] Cuirassier blessé quittant le feu, Théodore Géricault, 1814, Oil on canvas, 349cm x 266cm, Louvre, Paris.

19세기 낭만주의 회화의 수용 방식은 개성적 표현의 법칙과 기준이 개인에게 있다는 예술적 자유와 맞물리게 된다. 낭만주의 시대와 낭만주의 예술가들은 객관적이고 전통적인 가치에 기준을 종속시키기보다, 스스로가 기준을 만들고 그 기준에 의해 평가받기를 원하는 표현적인 성격이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까지 모든 미술가들에게 개방된 살롱 문화가 감상자 수의 증가를 만들며 개인 전람회, 아뜰리에 전람회 등 전시 형태가 늘어남에 따라 자연스럽게 미술 감상자 계층도 확보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를 통해서 볼 때, 제리코의 회화에는 당시 주목받는 사건에 대한 관심과 정치적 메시지가 반영되어 있고, 19세기 낭만주의 회화사에서 회화가 사람들에게 가져다 줄 영향을 인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제리코가 사건의 경위 파악을 위해 생존자들을 직접 만나고 동시에 그들의 경험을 강조하는 서사적 표현을 통해 사건의 경위를 덮으려는 당국의 왕정파 언론에 정치적 개념 의식을 표출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회적으로 나폴레옹의 워털루 패전 이후, 왕정복고 시대에 군주제 부활 속에 발생한 비극적인 사건을 통해 제리코는 정부와 언론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주고자 하였는데, 이는 그가 당시 자유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나폴레옹 실각 이후 다시 일어난 군주 통치에 반감을 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결과적으로 제리코의 <메두사의 뗏목>은 ‘메두사 호 사건’의 선장인 뒤루아 드 쇼마레에게 책임을 묻을 수 있는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 따라서 <메두사 호의 사건>은 정치적 사건을 시각적으로 구현한 작품으로 볼 수 있으며 화가 개인의 정치적 개념 의식을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가 근본적으로 회화의 바탕에 깔렸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는 19세기 낭만주의 회화가 이제 막 이성 중심에서 벗어나 예술가의 상상력과 감수성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한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Benedict Nicolson, The 'Raft' from the Point of View of Subject-Matter, The Burlington Magazine, Vol. 96, No. 617, Théodore Géricault (Aug., 1954), pp. 240-249.

Lee Johnson, The 'Raft of the Medusa' in Great Britain, Vol. 96, No. 617, Théodore Géricault (Aug., 1954), pp. 249-254.

H.W 잰슨 , A.F. 잰슨, 『서양미술사』, 최기득 옮김, 미진사, 2008.

아르놀트 하우저,『문학과 예술의 사회사3:로꼬꼬 고전주의 낭만주의』, 염무웅 옮김, 창작과비평사, 1999.

H. 사비니, A. 코레아르, 『메두사 호의 조난』, 심홍 옮김, 리에종, 2016.

이미지 출처: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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