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Yeon-Jeong Danielle GO
[국문] 15분 1화, 냉소적이거나 인간적이거나
최종 수정일: 2022년 12월 28일
15분 을 다시 시작하며 - 냉소적이거나 인간적이거나.
Yeon-Jeong Danielle GO
안녕하세요, 아트팩트의 고연정입니다.
사실 15분의 예술로 칼럼을 쓰는 것이 처음은 아닙니다.이 전의 외로움의 가시화 부터 최근의 뒤샹의 상점 뒤지기 편까지, 몇 년 전 15분의 예술로 발행되었던 칼럼들을 올린 것이니 말입니다.
15분은 앤디 워홀이 언급했다 알려지면서 평한 단어가 특정성을 얻게 된 경우입니다. 그런 15분 으로 다시 시리즈 칼럼을 시작한 이유는, 15분이 비 전공인 들에게도 익숙할 법한 용어이기도 하고, 그림을 5분씩 나누어 생각하는 것을 제안하기 위해서 이기도 합니다.
아트팩트를 만들고, 팟 캐스트와 칼럼들을 진행하면서, 많은 분들이 내용이 쉽지 않다는 말을 많이 전해옵니다. 아무래도 눈으로 볼 수 있는 이미지도 없고, 재미있는 가쉽을 말하는 것도 아니니 그럴만도 하죠. 그래서, 15분 은 다소 미술사 강의와 같았던 분위기에서 벗어나, 같이 미술관에 가서 함께 논다는 느낌으로 써보려고 합니다. 아마 저와 같이 미술관에 간다면 이런 느낌이겠죠. (원래는 같이 가도 별 말을 안하긴 하지만요.)
첫 5분은 그림을 그저 눈으로 보는 단계입니다.
무슨 색으로, 어떤 것을, 어디에 어떻게 그렸는지 보는 시간이죠.

지금 당신의 눈 앞에 있는 여자의 두상 세로 44cm, 가로 36cm 정도의 크지 않은 크기의 그림은, 여자의 두상입니다. 윤곽선을 검은 색으로 잡는 다른 그림들을 떠올려 본다면, 이 그림의 윤곽선은 굉장히 흐릿하다 생각되죠. 머리 칼 부분을 보면 마치 머리칼이 물에 잠겨 흩어지는 것처럼 보일 정도니까요.
뒷 배경은 옅은 파란색으로, 쇄골 아랫부분은 마치 물에 잠긴 것 처럼 표현되어 마치 물에 떠있는 듯 보이죠. 심지어 이 그림 속 모델이 정확히 어떤 장소에 있는지 모르겠네요. 어쩌면 욕조 안일 수도, 숲의 호수일수도, 혹은 어떤 이의 상상 속 일수도요.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종이의 질감이 들여다 보일 정도로 두껍지 않은 붓질을 했다는 걸 알 수 있네요. 이러한 옅은 채색이 흐릿함을 증폭시켜 몽환적인 느낌을 더 강조된 것은 아닐까요 ?
이 때문에 우리 같은 관람객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뺏기지 않고 모델의 감은 눈에 집중하게 해줍니다.

오딜롱 르동 Odilon Redon (1840-1916), 감은 눈, Les yeux clos, 1890
Huile sur carton, H. 44 ; L. 36 cm, Paris, musée d'Orsay.
© RMN-Grand Palais (Musée d'Orsay) / DR
다음 5분은 오딜롱 르동에 관한 이야기와 함께 그림을 보는 시간입니다. 보르도의 유복한 집안 출신의 오딜롱 르동. 오딜롱의 이름은 그의 어머니, 마리 게렝의 별명인 오딜에서 따온 것입니다. 르동은 태어날 때부터 몸이 좋지 않았고, (아마도) 간질을 앓고 있었는데요, 태어난지 이틀 만에 (!) 프랑스 메독의 마을인 페렐르바드로 요양차 보내져, 부모님과 떨어진 채 그의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보내게 되었죠.

오딜롱 르동 Odilon Redon (1840-1916), 페렐르바드로 가는 길, Le chemin à Peyrelebade
Non daté, Huile sur papier contre collée sur carton,
H. 46,8 ; L. 45,4 cm, Paris, musée d'Orsay.
Legs de Mme Arï Redon, en exécution des volontés de son mari, fils de l'artiste, 1984
© RMN-Grand Palais (musée d'Orsay) / Christian Jean
그는 그 곳에서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 머리를 스쳐가는 바람 등을 보고 느끼고, 상상하며 외로운 유년시절을 보냅니다. 페렐르바드로 가는 길 이라는 작품을 보면, 감은 눈에서도 몽환적 느낌을 주었던 파란 색을 다시 한 번 볼 수 있죠. 어쩌면 파란 색의 몽환 적인 느낌은 그가 유년 시절부터 내면에 간직해온 외로움에 대한 간접적인 표현은 아닐지 생각하게 됩니다. 그의 신체적인 눈은 누구나 볼 수 있는 것을 보지만, 그의 내면은 자유로운 상상을 보는 또 다른 눈이 있었던 것이죠.

앞서 우리가 집중했던 감은 눈은 내면의 세계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 방식은 르동에 의해 처음으로 시도된 방식은 아닙니다. 15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프란체스코 로라나 Francesco Laurana의 여인의 초상을 보면 이렇게 명상하듯 감은 눈을 볼 수 있죠.

프란체스코 로라나, Francesco Laurana, 여자의 초상, Portrait of a Woman, 1470
Marble, traces of pigment, height 47 cm
Frick Collection, New York
이처럼 예술 작품 속에서 눈을 감는 다는 행위는 외부 세계와의 차단을 의미하는 동시에 내면 세계와의 연결을 뜻합니다. 잠을 잘 때, 눈을 감고 꿈을 꾸게 되는 것, 또는 죽음의 순간에 눈을 감는 것 처럼, 예술 작품에서는 잠, 꿈, 죽음, 그리고 내면 세계와 같은 상징적인 표현을 하고자 할 때, 바로 이렇게 감은 눈을 쓰곤 하는 거죠.

부오나로티 미켈란젤로 Michelangelo BUONARROTI dit MICHEL-ANGE Caprese (Arezzo), 1475 - Rome, 1564, 죽어가는 노예, Captif ("l'Esclave mourant") Marbre, H. : 2,28 m. Exécuté en 1513 - 1515 pour le tombeau du pape Jules II.
Entré au Louvre en 1794
Département des Sculptures
© 2010 Musée du Louvre / Raphaël Chipault
여러분에게 친숙할 미켈란젤로의 작품 죽어가는 노예에서도 모델인 노예의 눈은 감겨있습니다. 다소 감각적인 이 조각 작품은 작품의 제목 ‘죽어가는 노예’와 상반되게도, 모델이 취하고 있는 포즈가 편해 보이진 않습니다. 받침대에 불안정하게 놓인 발, 그리고 가슴에 팽팽하도록 꽉 감겨진 붕대가 불편하다는 듯 가슴에 얹은 손, 그리고 머리칼을 쥐려는 듯 올린 반대 쪽 팔. 다소 불편하게 보이는 이 포즈는, 마치 모델이 죽어가는 것인지, 자는 것인지, 아니면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나려는 것인지 구분하기가 어렵게 만들죠.
어쩌면 르동이 고전적인 표현기법을 택한 이유가 그 시대 때 고전적 주제를 그리고자 했던 화가들이 많아서 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감은 눈’이 가지고 있는 불명확함 때문에 이러한 표현 기법을 사용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로 이 그림의 뒷 배경이 불명확한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죠.
상상의 세계, 꿈의 세계는 대부분 정확한 이미지를 보이지 않습니다. 섬세한 설정과 강박적일 정도의 이미지 구성보다는 (얀 반 에이크의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에 쓰였던 하나하나 섬세한 설정이나, 독일 바이마르 시대 화가들의 강박적 정물을 떠올려 본다면) 불명확 하지만, 이처럼 떠다니는 것과 같이 보이는, 작가의 자유로운 표현을 볼 수 있죠.

오딜롱 르동 Odilon Redon
잔 위에 놓여진 순교자의 머리, Tête de Martyr posée sur une Coupe, 1877. Fusain et craie noire, H. 0,366 ; L. 0,363. Inv. n° KM 107.499 Otterlo, Rijksmuseum Kröller-Müller.
실제로 감은 눈 뿐만 아니라 다양한 형태로 그려진 감은 눈은 르동의 석판화 및 뎃생 시리즈 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표현입니다. 특히, 눈을 감고 있는 잘려진 두상이 접시에 올려진 형태를 볼 수 있는데, 이는 당연하게도 팜므파탈로 현 시대에도 많이 알려진 살로메와 세례 요한의 이야기를 생각나게 하는군요.
자신의 이복형제의 아내, 헤르디아와 결혼한 헤롯 안티파스는 당시 대중의 지지를 받고 있던 세례 요한에게 비난 받고 있었습니다. 따르는 이가 많았던 세례 요한을, 대중의 분노가 무서웠던 헤롯은 차마 죽이지 못하고 감옥에 가둡니다. 한 편, 헤르디아는 자신의 결혼을 비난한 세례 요한이 달가울 리 없었고, 자신의 딸을 이용해 세례 요한을 합리적인 (?) 방법으로 죽일 묘수를 세우죠. 헤롯의 연회에서 춤을 추고, 그 춤에 반해 무엇이든 들어 주겠다 하는 헤롯에게 살로메는 세례 요한의 머리를 요구하고, 그렇게 헤롯은 세례 요한을 죽일 명분을 얻게 된 것이죠.
바로 이러한 살로메의 이야기가 많은 화가들을 매혹시킨 것인지, 이 에피소드는 많은 화가에 의해 다뤄지게 됩니다. 여러분에게 가장 익숙할 작품으로는 귀스타브 모로의 1871년작 살로메가 있겠군요.

귀스타브 모로, Gustave Moreau
헤롯 앞에서 춤추는 살로메, Salomé dansant devant Hérode, 1876
© Musée Gustave Moreau
르동은, 이 이야기에서 살로메 보다 잘려진 세례 요한의 머리에 더 집중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만큼 내면의 세계에 더 집중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 잔에 올려진 머리는, 차갑게 보일 만큼 냉소적 표현입니다. 세례 요한의 머리로 상징되는 내면의 세계는 수난을 겪은 후 찾아온 안식의 세계일 텐데요. 르동은 이 평화롭지만은 않은 그림들을 그려내면서 안식을 찾으려 노력한 것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5분이 지나 15분이 되었네요.
르동의 작품에 대한 나머지 상상은 여러분의 몫으로 남기며, 이만 15분 마칩니다.
이미지 출처
- 오딜롱 르동의 모든 회화
http://www.musee-orsay.fr/fr/collections/
- 프란체스코 로라나의 조각
https://www.wga.hu/
- 부오나로티 미켈란젤로의 조각
http://cartelfr.louvre.fr/cartelfr/
- 귀스타브 모로의 그림
http://www.exponaute.com/magazine/2017/04/14/
- 오딜롱 르동의 뎃생
https://www.akg-images.fr/archi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