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Yeon-Jeong Danielle GO
[국문] 뒤샹의 상점뒤지기
최종 수정일: 2020년 4월 7일
뒤샹의 상점 뒤지기
Yeon-Jeong Danielle GO 고연정
현대 미술을 이야기하면서 뒤샹을 언급하지 않기는 어려운 일이죠. 현대 미술을 분석하는 방법론 같은 분야를 공부하다 보면, 뒤샹의 영향이 얼마나 큰지, 그리고 이름의 유명함 때문에 역설적으로 그 것이 얼마만큼 대중에게 가볍게 평가되는 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일찍이 초현실주의의 주창자이자 시인이었던 앙드레 브르통은 뒤샹에 관해,
≪뒤샹은 20세기 최고의 지성인이다. 뒤샹의 이름 주위에는 탐구하는 사람들을 위한 진정한 오아시스가 있다.≫ .
라고 말했고, 파블로 피카소는,
≪후대의 예술가들은 뒤샹의 상점을 뒤져 그 포장을 바꾼다.≫.
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들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오늘칼럼에서는 뒤샹의 미학에 대해서 이것저것 설명하는 것보단, 오아시스에서 목만 약간 축이는 정도로 뒤샹을 알아보기로 하죠.
하지만 여기에서는 뒤샹의 작품에 관한 전시이야기나, 역사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건 여러분이 직접 관심이 생기면 찾아볼 수 있는 이야기들이고, 제 목적은 그 작품의 역사에 대해 장황하게 늘어놓는 것 보다, 그 작품이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니까요. 우리에겐 그 작품이 어떻게 어디에 전시되었는지 보다 그래서 남성용 변기가 왜 예술인지가 중요하지 않나요 ? 그럼 시작해 봅시다.
마르셀 뒤샹의 이름을 들으면 무엇이 가장 먼저 생각나시나요 ? 아마도, 남성용 변기를 전시한 작품, 샘이나, 자전거 바퀴가 떠오를 겁니다. 하지만 그 것이 레디메이드로 분류되는 작품이란 것은 알아도, 정확히 레디메이드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기는 어렵죠. 레디메이드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기성품이라 정의되어 있습니다. 눈으로 보다시피, 이미 공장에서 만들어진 상품을 예술 작품으로 전시한 것이죠. 그렇다면, 도대체 왜 뒤샹은 직접 가서 굳이 그 것을 그런 기성품을 선택하고 전시 했을까요 ? 그리고 잘 차려 입고 전시회에 갔던 사람들은 마치 작품처럼 놓여있는 변기나, 자전거 바퀴를 보면서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요 ? 우선, 놀랐겠고, 기자들이나 평론가들은 조롱한다는 느낌마저 받았으리라 생각됩니다. 마치 지금 우리가 현대 미술은 이해할 수가 없다, 도대체 왜 그렇게 많은 돈을 주고 사느냐 ? 작품의 의미라는 것은 평론가나 작가 스스로 말하는 게 다가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죠.
그런데 사실 뒤샹은, 완전히 는 아니지만 사실은 이런 사람들 축에 있었습니다.
샘이나, 자전거 바퀴를 보기 전에, 뒤샹의 병 건조대를 먼저 보도록 하죠. 아직 레디메이드로 부르기 전이기는 합니다만, 그 전조가 보이는 작품입니다.

어느 날 뒤샹은 시청 근처 백화점 같은 곳의 철물 제품 코너에서 이 병 건조대를 삽니다. 전시는 하지 않았지만 여러 가지 말들을 적어서 꾸미기 시작합니다. 뒤샹이 병 건조대를 작품으로 만들기 위해 많은 고민을 하고 선택을 했을까요 ? 흔히 우리가 말하는 점하나 찍기까지 많은 생각을 했으니 이 작품은 의미가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같은 과정을 거쳤을 까요 ?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뒤샹은 그런 상황을 비판 했지요.
뒤샹의 시대는 전쟁에 가까운, 황폐한 시대였고, 예술가들은 사회비판적 예술을 많이 들고나왔던 때였습니다. 종종 시대상황과 자신의 어린 시절, 그리고 본인의 생각을 작품에 쏟는 작가들이 많았던 시기였죠.
뒤샹은 그런 미학적 고찰을 하는 작가들에게 반대했습니다. 이것은 뒤샹이 했던 말을 보면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 화가는 그림을 그리고, 자신이 그리는 것에 자신의 취미, 취향을 적용시킨다. 레디메이드에서는 그런 의도나 느낌을 제거해 버리고, 좋다, 나쁘다, 심지어 무관심한 취향의 존재까지 완전히 없애버리는 것이다. ≫.
어떤가요 ? 앞서 말했던 우리가 이런 작품에 대해 가졌던 편견과는 상당히 다른 말이죠 ? 그럼 이제, 여기 까지는 이해했다고 칩시다. 그럼 그래서, 이 작품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
뒤샹에게 작품은 생각의 산물이 아닌 순수한 작품 자체로 존재합니다. 잠시 후에 뒤샹의 편지에서 다시 한 번 이야기 할 테지만, 예를 들면, 작품은 작가의 취향, 생각, 관심 조차 전혀 들어가지 않은 하나의 순수한 창작물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죠.

여기에서 우리는 또 한 번 해석의 어려움에 부딪힙니다. 좀 더 깊게 들어가 보죠. 그렇다면 무관심은 선택이 아니지 않은가 ? 아닙니다. 뒤샹은 무관심은 또 하나의 선택, 즉 ‘무’를 선택하는 것이라 말합니다.
그러므로 ‘무관심’조차 선택하지 말고 완전히 선택으로부터 자유로워 지는 겁니다. 선택하지도 않고, 선택을 하지 않지도 않죠. 좀 어렵나요 ?
어렵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뒤샹은 창작의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버린 겁니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레디메이드는 많은 과정을 거친 정신적인 의미의 선택과, 취향, 즉 작가가 가지고 있는 미적 취향을 ‘무’선택 (선택을 하지 않는다고 쓰면, 이미 선택을 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에 선택 자체의 부재라는 의미에서 ‘무’ 선택이라 씁니다.) 한 산물인 겁니다. 이제 이해가 약간씩 되기 시작하죠 ?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레디메이드가 궁극적인 방향은 어디일까요 ? 선택과 선택하지 않음은 서로 반대되는 겁니다. 그렇죠 ? 그렇다면 우리가 말한 ‘무’ 선택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 바로 선택과 선택하지 않음의 공동지대에 있는 것이죠. 바로 이 공동 지대에 있는 공동 지성, 그것을 사고하는 것, 바로 이 것이 레디메이드와 뒤샹이 지향했던 예술의 의미인 것입니다.

우선, 유명한 자전거 바퀴부터 봅시다. 자전거 바퀴는 뒤샹이 말했던 레디메이드 일까요 ? 놀랍게도 아닙니다. 왜 ? 머리가 아픈가요 ? 자, 왜 레디메이드가 아닌지는 뒤샹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자전거 바퀴는 '우연'이라는 개념과 관계가 있습니다. 우연적으로 자전거 바퀴가 아마 뒤샹의 눈에 들어왔을 겁니다. 이미 이 순간부터 뒤샹은 그 자전거 바퀴에 ‘매력’을 느끼게 되어 버린 겁니다. 다시 말해 ‘미’를 느껴버려서 그 것을 ‘선택’ 하게 되어버린 거고, 그것을 자신의 아틀리에에 ‘장식’ 하고 결국, 자전거 바퀴는 뒤샹의 아틀리에에서 일종의 분위기를 창조해 버린 것이죠.
약간 복잡해 지기 시작했나요 ? 괜찮습니다. 사실은 뒤샹 스스로도 레디메이드에서 이상한 점은 결코 완벽하게 마음에 드는 설명이나 정의를 할 수 없었다고 말했으니까요. 그저 우리에게는 그 무관심의 자유에 대해서, 공동 필드에 대해서 사유하며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 겁니다. 한마디로 레디메이드 라는 것은 하나의 예술이라기 보다 하나의 작용, 즉 하나의 계기, 시작점으로써 존재한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쉬워집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작가 가진 손으로 만드는 것에 대한 예술과 그가 작품을 만들면서 생긴 기술에 대한 노하우, 그리고 작가 자체의 취향과 그것을 판단하는 관객의 취향에 대한 미학적인 편견에 대한 비판입니다.
관객의 취향 ? 관객의 취향은 사실 기존의 예술에 있어서는 관객 스스로의 취향이 아니라고 뒤샹은 생각했던 겁니다. 작가가 관객의 의지대로 하는 자유를 주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작가가 자신의 취향을 전재로 해서 ‘자신’ ‘자체’ ‘취향’과 ‘노하우’에 의지한 작품을 전시를 했고 관객은 그렇게 나온 작가가 완전히 관여한 작품 앞에서 자신의 의지, 취향, 판단을 ‘제한’받는 겁니다.
바로 이 것을 비판했던 것이고, 저 역시 이런 방식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바로 이것을 효과적으로 작용하기 위해, 뒤샹은 자신의 손으로 만든 것이 아닌, 공장에서, ‘기계’가 만들어낸, 예술가가 시작적으로 아무런 관심도 없는, 마치 마비된 것과 같은 상태에서 가지고 온 ‘기성품’을 우리 앞에 내놓은 겁니다.
다시 말해, 기성품 자체는 레디메이드가 아닙니다. 하지만 무관심의 ‘자유’에 도달한 그 순간, 바로 그 순간에 비로서 기성품이 레디메이드가 되는 겁니다.
아까 말하기로 했던 뒤샹의 편지를 보면 그냥 아무 단어나, 그러나 확실히 미적으로 아름다운 단어를 늘어놓고 있습니다. 그 것들은 의미가 통하는 문장도 아니고, 어떠한 암호에 속하지도 않고, 어떠한 뜻을 품고 있지도 않지만, 어떤 방향으로 지시한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마치 레디메이드가 우리에게 작용하는 것과 비슷한 의미죠.
여기까지 보니 뒤샹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 지지 않나요 ? 사실은 기괴한 행동을 해서 유명해지고 싶었던 예술가는 아니었는지, 우리가 그런 것에 속고 있는 것은 아니었는지 말이죠. 자, 그 것에 대한 생각은 뒤샹의 말과 함께 이만 칼럼를 마치도록 하죠.
≪전쟁이 일어나기 오래 전부터 나는 내가 얽매여 있는 ‘예술가적 삶’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나의 바람과는 완전히 반대였지요. 그리고 전쟁이 터지고 나서 예술가적 삶을 좋아하는 계층과 나의 부조화는 더 심해졌습니다. ≫.
(뒤샹은 이미 파리 예술계에서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로 명성을 얻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술가로서의 최소한의 보증을 제공받지 않기 위해 미국으로 갑니다.)
≪나는 영광과 돈을 추구하는 예술가의 삶을 예상하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이 내 그림들을 팔았다고 알려 줬을 때 대단히 기뻤고, 당신의 호의에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하지만 내 그림을 팔아야만 하는 상황에 이르게 될까 봐, 한마디로 말해서 화가 예술가가 될까 봐 두렵습니다.≫.
작품 정보
DUCHAMP Marcel (1887 - 1968)
- MUTT Richard, Fontaine (ou Urinoir), 1917, Porcelaine signee et datee, hauteur : 33, 5 cm (photographie d’Albert Stieglitz pour la revue ≪ The Blind Man ≫).
L’original a ete perdu et des repliques de faience blanche recouverte de glacure ceramique et de peinture de 63 x 48 x 35 cm ont ete realisees sous la direction de l’artiste par la Galerie Schwarz, Milan, en 1964.
- Porte-bouteilles (Egouttoir; sechoir a bouteilles; herisson), 1914 – 1964, Fer galvanise, 64 x cm Diametre : 42 cm, Inscriptions : S.D. en bas : Marcel Duchamp 1964 / exempl. Rrose.
L'original, perdu, a ete realise a Paris en 1914. La replique a ete realisee sous la direction de Marcel Duchamp en 1964 par la Galerie Schwarz, Milan, Porte-bouteilles.
- Roue de bicyclette, 1913, roue metallique montee sur un tabouret en bois peint, hauteur : 128, 5 cm, New-York, The Museum of Modern Art.
참고 서적
MARCADE Bernard, Marcel Duchamp, FLAMMARION SA, Paris, 2007.
ADES Dawn, COX Neil, HOPKINS David, Marcel Duchamp, Thames & Hudson Ltd, London, 1999.
이미지 출처
http://artplastoc.blogspot.fr/2013/08/148-marcel-duchamp-1887-1968-deuxieme.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