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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피스트리(tapisserie)의 역사
w. 송송이
태피스트리의 예술은 고대, 특히 고대 이집트로 거슬러 올라가는 매우 오래된 예술입니다. 고고학자들은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태피스트리 조각을 발견했고, 고대의 많은 자료들에서 그리스와 로마에 이르기까지 태피스트리의 기록이 남아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그리스의 꽃병에 베틀 그림이 새겨진 것도 볼 수 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중세시대 초기부터 실내 장식을 위해 양모 또는 실크로 직물을 짜는 예술이 이루어 졌습니다. 이 기술은 십자군 전쟁 동안 동양을 통해 전수 되었으며, 이 기간 동안 태피스트리는 중세시대 초기의 정치 및 경제 시스템의 발전으로 인해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이미 13세기에 태피스트리를 이용한 기업이 생겼으며, 14세기와 15세기에 이르러 군주, 성직자, 왕가, 공작, 백작 할 것 없이 예술가와 장인을 찾아 많은 태피스트리를 생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파리는 14세기 가장 유명한 패티스트리 아뜰리에가 있었고, 그 당시 아라스(Arras)라는 도시와 경쟁했습니다. 샤를 5세(Charles V)와 그의 형제들인 앙쥬(Louis 1er d’Anjou), 베리(Jean de Berry), 브르고뉴(Phillippe 2ème de Bourgogne) 공작들은 당시 가장 유명한 태피스트리 장인 이었던 니꼴라(Nicoleas Bataill, 1330-1405)에게 태피스트리를 제공받았습니다. 1379년 앙쥬 공작이 요한 계시록 태피스트리(Tapisseries de l`Apocalypes 혹은 Tenture de l`Apocalypse)를 주문 했고 약 100년이 지난 후 완성이 된 이 태피스트리는 현재까지 가장 오래된 중세시대 태피스트리이면서 가장 큰 규모로 앙제성(château d’Angers)에 전시되어지고 있습니다. 15세기, 영국이 파리를 점령하면서 파리의 패티스트리의 아뜰리에들은 마비되었고 랭스(Reims), 트루아(Troyes), 아비뇽(Avignon), 페르피냥(Perpignan) 같은 지방 소도시에서 태피스트리의 새로운 개발이 이루어졌습니다.

양모와 실크 그리고 때때로 금과 은사를 사용하여 태피스트리를 성과 종교적 건물에 추위로부터 보호하고 계절별로 공간을 장식하는 요소로 사용되었습니다. 15세기 후반부터는 패티스트리가 프랑스 북부과 플랑드르 지방을 중심으로 발달했지만, 여전히 가장 크고 풍성한 그림이 있는 태피스트리는 벨기에의 투르네(Tournai)에서 생산되었으며, 오늘날 까지 이 곳에서 제작된 많은 수의 태피스트리들이 성당과 박물관과 성들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이 태피스트리의 주제, 스타일과 구성은 플랑드르 회화를 연상하게 합니다. 후기 고딕 양식으로 당 시대의 의상을 입고있는 수많은 인물들로 빽빽하게 장면을 묘사하며, 주제는 일반적으로 신화적, 역사적, 종교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1513년, 영국군과 페스트 전염병으로 투르네(Tournai)의 아뜰리에들은 황폐화 되었습니다.
르네상스와 함께 프랑스의 태피스트리는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16세기에 이르러 태피스트리를 제작하는 독립적인 아뜰리에와 왕실 소유의 제조공장을 세웠습니다. 최초의 태피스트리 공장은 브뤼셀 작품과 경쟁하기 위해 퐁텐블로에서 프랑수아1세(François Ier)가 세웠습니다. 또한 이 시기에 이르러 안정적인 좌식(sédentarisme)생활이 시작되면서 태피스트리 예술은 침실 의류, 가구로 확장되어 ‘태피스트리 방’이라는 용어와 유행을 만들어 냅니다.

태피스트리는 당시 고급의 예술작품으로 간주되어 귀족들에게 본인의 부를 과시하거나, 종종 외교적 선물로 사용되었습니다. 16세기는 « 천개의 꽃(mille fleurs) »의 시대 였습니다. 땅을 묘사하고 전통적으로 행동과 의지와 관련된 색인 붉은색으로 태피스트리의 배경을 채웠으며, 특유의 자연주의적 모티브를 형성하는 작은 식물들과 꽃의 풍부함 때문에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항상 다루었던 종교적인 주제와 함께 자연이나 일상 생활의 장면에서도 영감을 얻어 제작했습니다. 이 시대 전반에 걸쳐 가장 대표적인 태피스트리 작품은 «유니콘과 여인 la fameuse Dame à la Licorne » 입니다. 화려한 옷을 입은 여성이 태피스트리 6개에 등장합니다. 각각 비슷한 방법으로 묘사된 같은 사람 이며 옷을 다르게 입고 있습니다. 이것은 미각, 후각, 청각과 나의 유일한 욕망(L’Ouïe et Mon seul désir)을 나타내는 시리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중세시대 여인의 의상과 헤어스타일을 통해 당시의 아름다움을 자아냅니다. 시리즈 중 여성은 유니콘의 뿔을 쥐고 있는데, physiologos(서양 중세에 널리 보급된 자연학서로 동식물, 광물, 특히 동물에 관한 도상의 근원이 된다.)에 따르면 실제 또는 가상의 동물을 묘사하는 고대 자연사 논문에서 성육신 그리스도의 미덕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여인은 자신의 몸을 통해 영적인 것에 접근할 수 있으며, 이러한 관점에서 나의 유일한 욕망은 감각을 통한 앎의 탐색을 종합합니다. 특히 장 드 거슨(Jean de Gerson, 1402)의 두번째 가설은 가장 물질적인 것에부터 영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중세 문학에 묘사된 감각의 계층구조를 나타냅니다. 외부 세계에 대한 민감한 경험을 일으키는 다른 감각과 달리 욕망을 나타내는 여섯 번째 감각인 마음« cuer » (le cœur)은 자신에게 다시 집중할 수 있는 내적 감각을 나타냅니다. 철학자 미셸 레세스(Michel Serres)가 정의한 이 신체의 완전성은 내부의 표현인 시도로 상징화 되었습니다. 이 작품들은 부삭성(château Boussac)에서 발견 되었으며 현재는 파리의 클루니 박물관(musée de Cluny)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17세기 초 종교전쟁의 발발로 많은 태피스트리 장인들이 프랑스를 떠났고, 이후 종교적 갈등이 진정 되자마자 앙리 4세(Henri IV)는 모든 예술과 산업활동의 발전을 위해 힘썼습니다. 루브르 미술관 내의 장인들의 숙소를 제공했고, 여러 유명한 예술가들을 프랑스로 초청하여 예술학교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전쟁 후, 태피스트리 작업장은 루이 15세(Louis XV)의 통치 첫 해인 18세기 초에 다시 작동되었습니다. 장인들은 많은 작품들을 만들었습니다. 이후 고전주의가 주를 이루던 루이 16세(Louis XVI)시기에 이르러 태피스트리는 혁명 전까지 매우 엄격하고 관습적인 모습으로 제작되었습니다. 이시기에 장인들의 상상력과 창의성을 점차적으로 종식시키는 개혁이 이루어 졌습니다.
19세기에 이르러 태피스트리는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술이 번성하는 동안 나폴레옹은 자신의 힘에 걸맞는 스타일을 만들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전쟁과 관련된 주제로 벽을 장식했습니다. 왕실의 제작공장 역시 태피스트리의 생산보다 프랑스 제국의 명성에 걸맞는 왕관 제작과 경제 확장을 목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의 태피스트리는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와 페르낭드 레제(Fernand Léger)를 비롯한 유명한 화가의 만화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 덕분에 다시금 부흥기를 가지게 됩니다. 현대에 이르러 장 뤼르사(Jean Luçat, 1892-1966)는 대표적인 태피스트리 작가이며 중세시대의 직공과 화가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재건하여 현대 태피스트리를 부흥시켰으며, 그의 작품은 Angers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참고문헌
Dominique CHEVALIER, Pierre CHEVALIER, Pascal-François BERTRANT, Les Tapisseries d’Aubusson et de Felletin, 1457-1791. Solange Thierry Editeur, 1988.
Sous la direction de Véronique MOREAU, Chanteloup. Un moment de grâce du duc de Choiseul. Somogy éditions d’art et Musée des Beaux-Arts de Tours, 2007.
Serge GRANDJEAN, Margherita SINISCALCO SPINOSA, Monique KING, Tapisseries Antiquités et objet d’art, éditions Fabbri, 19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