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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다-창조적인 예술적 제스처
최종 수정일: 2021년 7월 3일
w. 조혜준
Efface tes traces !
너의 흔적들을 지워!
Bertolt Brecht
Manuel pour habitants des villes: poèmes
마스크 없이 자유롭게 일상생활을 했던 순간들이 흑백 사진처럼, 오래된 추억을 꺼내어 되새겨 보아야만 하는 희미한 기억처럼 느껴지고, 한 해가 시작될 때 세웠던 모든 계획들을 이룰 수 없던 2020년은 많은 사람들에게 지우고 싶은, 별로 한 거 없이 속절없이 나이만 먹게 한 야속한 한 해였다. 시간이 흘러도 나아지지 않는 상황에 ‘2020년을 지워버리고 새로 시작하면 안 되나?’ ‘2020년을 지우고 싶다.’라는 말을 농담으로 하기도 했고 이 바람이 이루어지길 진심으로 간절히 원한 적이 한 번씩 있을 것이다.
지운다는 것은 이처럼 주로 부정적인 상황에서 있었던 생각이나 기억 따위를 의식적으로 없애거나 잊어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예술에서도 흔히 지운다는 행위는 그림의 수정이나 배경 혹은 인물 형태의 변형을 위해 흔적을 지우개나 물감을 덧대어 보이지 않게 고치는 것이다. 인물화나 풍경화에 있어 수정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은 곧 한 번에 완벽한 구도와 인물 상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이고 이는 불가능에 가까운 천재적인 능력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림을 지우고 수정하는 과정이 극히 드물었다는 데서 많은 사람들이 거장의 능력을 다시 한번 확인하듯이 말이다. 하지만 현대미술에 들어와 지운다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또 다른 창조의 행위가 된다. 지우는 행위 자체가 퍼포먼스 예술이 될 수도 있고 물리적으로 작품을 없애고 난 후의 나머지가 작품이 될 수도 있다. 파괴의 끝에는 또 다른 생성이 있고 예술가는 부정의 의미에서 긍정을 창조해 낸다. 미술사학자 Maurice Fréchuret는 2016년 발간한 지우다-예술적 제스처의 역설(Effacer-Paradoxe d’un geste artistique)이라는 저서에서 현대미술에서 지우는 예술적 행위들의 개념을 크게 1. 제거 2. 덮어씌우기 3. 묻기 와 같은 세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1]이 세가지의 큰 개념안에서 우리에게 지운다는 부정적 행위에 대한 인식을 긍정적으로 바꾸어주는 작품들을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제거는 대표적으로 우리가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지우는 행위가 주가 된 예술 작품을 예로 들 수 있다. 아래의 작품은 개념미술, 콤바인 회화의 대가인 로버트 라우센버그의 작품 Erased de Kooning이다. 대가의 작품을 지우개로 지워 빈 종이만 남게 한 작품은 많은 사람들이 유명한 작가의 작품[2]에 대한 도전, 추상 표현주의에 대한 비판ㅡ즉 우상 파괴자, 인습 타파 주의자 ‘iconoclast’의 성향을 띤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사실 라우센버그는 윌리엄 드 쿠닝의 그림을 지울 때 이러한 부정적이고 도전적인 생각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라우센버그는 당시 조금 엉뚱하게도 드로잉을 모두 흰색으로 바꿀 수 있을까에 대한 생각에 빠져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드로잉을 그리고 다시 모두 지워 흰색으로 만들고 하는 과정을 반복하였고 이를 반복하면서 지우는 행위 그리고 남은 흰색 바탕 자체가 예술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깨달았다. 그는 이 엉뚱한 아이디어가 완성되기 위해서는 유명한 누군가의 그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평소 존경하던 드 쿠닝에게 찾아가 자신의 아이디어를 설명했다. 설명을 들은 드 쿠닝은 « 당신의 아이디어르 이해를 하지만, 나는 그 아이디어에 함께하지 않겠다.[3] »라는 의사를 전하면서 나는 당신에게 지우기 아주 어려운 작품을 줄 것이라고 하며 한 작품을 건넸다고 한다. 목탄, 유성물감, 연필이 사용된, 흔적이 남고 지우기 힘든 드로잉을 받고 라우센버그는 꼬박 한 달이 걸려서야 드로잉을 지울 수 있었다. 라우센버그는 논란이 많은 이 작품이 단지 하나의 순수한 파괴의 제스처라고 보이길 원한다고 인터뷰에서 이야기 말했다.[4]단순한 파괴의 제스처에서 나아가 우리는 지우는 행위를 그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요하게 이끌어 낸 개념의 창조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Robert Rauschenberg, Erased de Kooning Drawing, 1953
두 번째로, 지우는 행위는 독일 예술가 Jochen Gerz가 작품에서 자주 사용하는 표현 방법이다. 1975년에 퍼포먼스로 진행된 L’autoportrait 은 장시간에 걸쳐 진행된 퍼포먼스였다. Jochen Gerz는 자신이 비치는 거울 위에 천천히 글씨들을 빼곡히 써 내려간다. 관람객은 카메라의 시선으로 비디오에 저장된 퍼포먼스를 보게 되는데 카메라는 작가와 거울이 나란히 비추어지는 각도에 맞추어져 있다. 관람객은 카메라를 통해 처음 거울에 비친 작가의 모습을 시작으로 작가의 얼굴이 글에 가려 더 이상 보지지 않는 끝을 마주하게 된다. 퍼포먼스의 끝은 빼곡히 적힌 글들로 인해 작가의 모습이 가려져 거울에 비쳐 보이지 않는 상태가 된다.
그는 자신과 사람들 간의 관계에 대한 고찰로 이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 태어나고 35 년이 지난 지금 나는 내가 시작한 곳에 도착했습니다. 내 말은 그 당시와 마찬가지로 나는 오늘도 혼자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끌어들이려는 나의 모든 노력은 사람들을 쫓아내고 나를 멀리한 것 같습니다. 더 끈질 기게 그들에게 나를 나타낼수록 그들은 더 많이 나에게서 멀어졌습니다. »[5]
작가가 열정적으로 작업을 진행하면 할수록 관람객들은 작가의 모습을 볼 수 없다. 관람객은 글로 지워져가는 작가를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그의 작품에서 지우는 것은 직접적으로 무엇인가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간접적으로, 글을 써 내려가는 수단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지워나가는 것이다.
자신이 남들을 위해 내면을 드러내고 노력하면 할수록 자신의 의도와는 다르게 멀어져 나가는 관계를 역설적인 표현 방법으로 표현한 것이다.

Jochen Gerz, L'Autoportrait, 1975
마지막으로 살펴볼 작가는 Felix Gonzales-Torres의 Untitled (Portrait of Ross in L.A), 1991 작품이다. 사탕이 쌓여 놓여져있는 작품은 단순한 구성을 보이지만 감정적으로 깊고 풍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Felix Gonzales-Torres는 작품들에서 주로190년대 후반, 작가가 살았던 시절 동성애자인 자신이 마주한 사회 현실에 대한 이야기와 자신의 연인과의 관계를 작품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그의 작품 스타일은 개념적이고 미니멀리즘적이지만 동시에 매우 개인적이고 깊은 이야기들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주제와는 어떤 연관이 있을까? Untitled (Portrait of Ross in L.A) 작품은 에이즈로 잃은 작가의 연인인 Ross가 살아생전 건강했던 몸무게인 79kg 만큼의 사탕이 공간의 구석에 쌓여져 있는 작품이다. 작품에 사용된 사탕은 관람객들이 가져가서 자유롭게 먹을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관람객은 자연스럽게 작품의 부분들을 지워나가는 소멸을 위한 과정에 참여하게 된다. 달콤한 사탕을 먹으며 작가와 연인의 영원한 사랑에 대한 생각에 잠기게 될 때 관람객은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작품을 지워나가는 과정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이 지워나가는 과정은 사실 절대 완성되지 못한다. 어느정도 사탕이 줄어들면 작가의 설치 지침서에 따라 79kg만큼의 사탕이 채워져야 하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사탕을 먹으며 작품을 훼손시키는 행위로 인해 관람객은 오히려 작가와 연인의 사랑을 다시금 기억하게 되고 실제로도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처럼 지워가는 행위 속에 그들의 기억과 사랑은 영원히 매립되어 있는 것이다.

Felix Gonzales-Torres, Untitled (Portrait of Ross in L.A), 1991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해가 바뀌어도 여전히 자유가 없는 현실에 쉽사리 부정적인 생각들에 사로잡히고 만다. 오늘 다루었던 지운다는 부정적인 예술적 제스처들을 긍정과 창조의 예술적 제스처로 바꾸어 작업한 작가들처럼 어려운 현실을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길 바라본다.
[1] Fréchuret, Maurice, [2] 1953년 작품을 제작할 당시 윌리엄 드 쿠닝은 벌써 거장의 대열에 있었고 로버트 라우센버그는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3] Rauschenberg, Entretien avec Dorothy Seckler, 21 december 1965, Archives of American Art, New York, p 27. [4]Robert Rauschenberg-Erased De Kooning 인터뷰 https://youtu.be/tpCWh3IFtDQ [5] https://jochengerz.eu/works/the-self-portra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