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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각과 예술: 관습적 재현과의 투쟁을 넘어서


w. 정지숙





네덜란드의 그래피즘 작가 에셔의 « 그리는 손»은 일상에서 관습적으로 인식하는 감각적인 정보에 대한 자동적인 지각에 제동을 건다. 그림 속에서 튀어나오는 두 손은 서로를 그리는 중일까? 아니면 그냥 연필을 대고 있는 걸까? 금방이라도 만져질 듯한 두 손이 평면적인 손목에서 마치 다른 차원으로 솟아나오기라도 한 것처럼 시선을 잡아 끈다. 인식의 사각지대를 건드리는, 이 모순적인 두 손이 만드는 뫼비우스의 띠를 보고 느끼는 바를, 글쎄, 어떻게 판단 내릴 수 있을까? 애초에, 감각과 지각, 인식 간의 차이는 무엇일까? 직관적으로 말해보자면-감각이 본 것이라면 지각은 보고 느낀 것이며 그리고 우리는 감각과 지각의 차이를 알고 있다-정도가 되겠다. 이 세 가지 중에서 가장 설명하기 애매한 존재를 꼽으라면 단연코 지각일 것이다. 실험심리학의 관점과는 달리, 지각-심리-철학에 있어 지각의 이미지란 단순한 사물세계에 대한 신체적인 반응을 넘어선 무엇인가를 의미한다. 즉 지각은 사물에 대한 감각 또는 앎에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지각이란 미학적, 역사적, 문화적, 인류학적, 제도적 등의 여러 현실에 접근하는 방식, 더 추상적으로 말하자면 어떤 환경 속에 놓인 개체가 접근 가능한 사물들이 존재하는 세계를 개시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 지각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라는 질문은 모든 철학적, 혹은 삶과 세계를 사유하고 해석하기 위해 던지는 질문 전체를 포괄한다.


거칠게 말하면 지각철학(Philosophie de la perception)과 예술은 지각의 존재론적 정의에 대한 언어적 혹은 이미지적 표현이 될 것이다. 물론 예술과 철학이 질문에 대답하는 방식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철학과 달리, 예술 행위에 있어 표현적 차원은 본질의 반영이 아닌 예술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제 예술에게 지각이란 무엇이 될 것인지 살펴보자. 예술 행위가 인간의 상상과 실재세계에 대한 지각행위의 주관적인 해석과 그 표현이라면, 예술 행위에 있어 지각은 외부세계를 인지할 수 있는 경험적 통로이자, 세계와 소통하는 표현매체이자, 동시에 경험적 지각 (혹은 감각정보) 자체와 다른 특수한 차원의 어떤 것, 즉 해석적 차원을 포괄할 것이다. 그리고 이 « 해석적 차원 »에 대한 여러 가지 관점이 예술적 이미지와 예술 표현 방식에의 차이를 낳았다고 가정하고 논의를 전개해보자.


이탈리아 르네상스 철학자이자 건축가이자-심지어 운동선수이기도 했던-알베르티 (Alberti, 1404~1472)에 따르면, 회화의 목적은 이성의 원리에 따라 외부세계를 충실히 재현하는 것에 있다. 그는 저서 회화론에서 건축적 구조인 창을 회화론에 도입하여 3차원의 세계를 2차원의 회화 공간에 재현하는 원리, 즉 원근법을 확립했다. 르네상스 인간의 표본인 알베르티가 세운 과학적 예술의 체계 내에서, 지각은 2차원 평면 내에서 거리감과 입체감을 느낄 수 있게끔 감각과 인식을 연결하는 기능적인 차원으로 존재한다. 근대로 넘어가면서 지각의 입지는 점점 좁아진다. 근대주의의 시초 데카르트의 광학론에 따르면, 감각 이미지는 이성이 물체를 사유한 결과다. 즉 물체를 만지거나 봄으로서 물체를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물체를 이해함으로써 비로소 물체는 지각되는 것, 물체는 사유로 인해 느낄 수 있는 것이 된다. 다시 말해, 근대에 이르러 감각과 대상 사이-어딘가-에 위치한 지각의 영역은 사유의 영역에 환원(réduction)된다. 지각의 해석적 차원을 사유 능력에 의해 정신에 표상되는 재현(Représentation)으로 간주하는 순간, 지각의 정의는 환원주의적 관점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본질과 표상이라는 이분법적 구조 속에서, 어딘가 중간에 위치한 지각과 예술적 표현은 사유에 종속된다.


그러나 예술적 이미지 뒤에 위치한 이미지의 소위 이상적인 원형, 이미지로 하여금 자신을 대리하여 표상하게 끔 만드는 전형(혹은 세잔에게 있어 상투형- 써서 버릇이 되다시피 유형-)의 존재는 이미지가 원본의 복제에서 독자적인 차원을 지닌 객체로 (아트팩트 칼럼 스크린, 나타나는 면을 기다리는 의식에 관하여 참조) 존재론적인 전환을 시도함에 따라 예술사에서 차츰 흥미롭지 않은, 혹은 넘어서야 할 존재로 파악된다. 이 ‘새로운’ 혹은 포스트-근대적 이미지는 이를 테면 « 처녀의 순결 »을 상징하는 (그리고 권고하는) 마리아의 수태고지 회화 전형처럼 모두에게 동일한 메시지를 전달해야 하는 의무에서 이탈하여, 관념 세계가 아닌 실재 세계에 위치한 한 사물에 대한 주관적인 해석을 제시한다. 이미지는 이제 구문적으로 읽어야 할 것이 아니라 지각적으로 느끼는, 독자적인 실존성을 가지는 하나의 개체가 된다.

이제 예술은 지각을 새롭게 정의하기 시작한다. 예술은 사유로 환원 불가능한 종류의 지각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표출하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서 폴 세잔(Paul Cézanne, 1839-1906)은, 사유로부터 독립된 회화적 공간에 대한 이해를 개척하였는데, 이 회화적 공간은 (칸트 식의) 공간과 시간이라는 선험적 감성 형식의 구조를 통해 사물을 파악하는, 사유적 지각이 만든 공간이 아니다. 세잔의 회화적 공간은 지각된 공간, 그가 느낀 사물들 사이의 관계로부터 발생하는 사물세계의 구성이 표현된 공간이다. 세잔에 의해 캔버스에 구현된 예술적 공간은, 때로는 사물적인 이미지의 배치에 있어 불균형을 초래하게 되는데, 이는 지각의 국지성 때문이다. 실재 세계의 지각은 사유로 구성한 완전한 가상적 공간과는 달리, 변화에 종속된 불안정한 시점들이 얽어내는 브리콜라주사이 에서 솟아 오르기 때문이다. 세잔이 상투형과 싸운다고 말할 때, 그는 눈 앞의 대상을 기억 속의 이미 보았던 비슷한 사물에 비춰서 (감각기관이 받아들이는 내용에 과거의 기억이 겹치는 투사현상) 관습적인 시각 이미지로 재-구현해내는 재현의 관성과 싸운다는 것이다.


예술이 밝혀내는 새로운 지각에 있어, 사진에 관한 이야기가 빠질 수 없을 것이다. 사진 역사의 초반에는 사진기에 의해 필름에 맺힌 영상 이미지가 ‘사물세계를 있는 그대로 포착하여 드러낸다’는 믿음이 있었다. 적어도, 처음에는, 사진기가 포착한 사물세계와 그의 이미지 사이에, 사유가 침입할 그 어떤 틈도 없는 것으로 간주 되었다. 그리고 이 믿음이-믿음이 지각과 인식, 경험의 가장 심층적인 토대라는 가정 하에-인간과 세계의 관계에 대한 지대한 변화를 이끈다. 비사유적으로 지각하는 인간, 즉물적으로 느끼는 인간에 대한 즉물 사진(photographie pure)의 표현은 대상을 바라보는 주체로서의 관점에서 벗어나, 사물 대 사물로 세계를 지각하는 관점을 표현한다. 정리하면 예술이 사유에 환원되지 않는 지각의 영역을 해석하여 구현해내기 시작했는데, 하나는 일종의 창발주의(émergentisme)적 해석이라 할 수 있겠고 다른 하나는 물리주의(physicalisme)적 해석이라 할 수 있겠다.


마지막으로 지각의 이미지에 대한 총체적 이해의 변화를 가져온 철학자 메를로-퐁티(M. Merleau-Ponty, 1908~1961)와 함께 오늘날의 예술과 지각에 대한 지각철학의 전체론(holisme)적 관점에 입각한 해석으로 이 칼럼을 마치고자 한다. 메를로-퐁티는 어떤 의미에서는 칸트와 마찬가지로, 지각경험에 있어 어떤 근거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지각의 토대는 선험적으로 주어지는 판단이 아니라 신체성에 있다. 즉 메를로-퐁티는 사물세계와 그를 관찰하는 사유의 주체라는 설정에서 벗어나, 신체와 신체를 둘러싼 세계 간의 관계, 즉 몸과 그 몸을 감싸는 몸이 서로를 구성하는 관계에서 출발하여 그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으로서의 지각을 해명한다. 이때 지각이란 세계에 귀속된 하나의 신체가 세계와 벌이는 교감 작용(interaction)의 표현이며, 이는 사물세계에 대한 감각적인 반응(réaction)이나 반성(réflexion)과 다른 차원의, 존재론적인 운동이 된다. 왜냐하면 지각은 하나의 신체가 세계 속에 존재하기 위해 세계에 자신을 끊임없이 기입해 나가는 하나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지각은 베르그송(Henri Bergson, 1859-1941)이 말하듯 « 살아있는 전체성의 표현 »이다.


새로운 예술에는 새로운 지각 방식이 요구된다. 혹은, 새로운 예술은 새롭게 지각하기를 요구한다. 오늘날의 관람객들은 박제된 예술작품 앞에서 사유의 바다 속으로 침잠하지 않는다. 마술적 환영 속에 자신을 숨기는 예술작품의 시대는 아마도 지난 것 같다. 예술작품은 이제 온몸으로 지각하기를, 온몸으로 느끼기를 요구한다. 관람객들 또한 적극적으로 움직이며 새로운 지각을 요구하는 작품들에 즉각적으로 반응한다. 현장의 반응이 온라인 매체를 타고 퍼져나가 예술 작품의 새로운 신체를 구성한다. 하나의 예술 작품은 이제 하나의 개별적인 사건에 가깝다. 예술은 이미 세계 속에서 새로운 지각의 차원을 구성하는 하나의 신체이다.





에셔를 구글 아트에서 검색하자, 그의 작품 « 상대성(Relativitiy) »을 3D 모델링한 이문호 작가의 작품과 전시 이미지가 연관 이미지로 떴다. 에셔가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 상대성 »은 새로운 예술이 요구하는 새로운 지각 속에서 다시 태어난다. 에셔 뿐만이 아니다. 미디어 아트를 통해 각양각색으로 재해석되어 도처에서 강생하는 마그리트와 고흐를 보라! 새로운 매체와 발전된 기술과 함께 예술은 지각의 새로운 해석적 차원을 구축해 나아간다. 예술은 관습적 재현과의 투쟁을 넘어 상상을 여기 이곳에 현현하고 있다.



참고 문헌


M. Merleau-Ponty, L’œil et l'esprit, 1960

M. Merleau-Ponty, La phénoménologie de la perception, 1945

E. H. Gombrich, L’art et l’illusion : Psychologie de la représentation picturale, 1987

Jérôme Dokic, Qu’est-ce que c’est la perception ? 2004

[지각의 존재론적 이미지와 예술비평], 윤대선, 철학탐구 제 41집, P.93-123, 2016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 회화론, 김보경 옮김, 기파랑, 2011.



이미지 출처


이미지1

Drawing Hands, Maurits Cornelis Escher, 1948

https://www.wikiart.org/fr/maurits-cornelis-escher/drawing-hands

이미지2

Relativity by M.C. Escher(Installation view_CAIS Gallery), Moonho Lee, 2006

https://artsandculture.google.com/asset/relativity-by-m-c-escher-installation-view-cais-gallery/zAG_-BIA7chLag?childassetid=3wEz1pue3jU2nQ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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