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 Artfact projectgroup

[연속기획칼럼] 벗은 몸으로 나타나는 예술가



w. 정지숙



앞선 칼럼에서, 필자는 “지각 활동”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 바 있다. 하나의 신체가 세계 속에 존 재하기 위해 세계에 자신을 끊임없이 기입하는, 하나의 과정이자 ≪ 살아있는 전체성의 표 현 ≫(아트팩트 칼럼, 지각과 예술: 관습과 투쟁을 넘어서 참조). 또한 오늘날 예술은 세계 속에 서 새로운 지각의 차원을 구성하는 하나의 신체로서, 관람객들에게 관조의 미학에서 벗어나서 자신을 온몸으로 지각하고 느끼기를 요청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와 같이 예술이 전면으로 자신 을 드러내고 있는 시대에, 예술가는 어디에 있으며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번 편에서는 자신의 신체를 예술 작품의 질료로 사용하는 예술가와 표현 주제 “몸”을 통해 몸과 지각, ≪ 살아있는 전체성의 표현 ≫에 대한 사유를 이어나가보자.


예술가란 무엇인가? 그의 정체성에 대해서 한번 따져 물어보자. 우리가 곧장 즐기는 표현이 있 다. ≪ 예술가는 작품을 통해 말한다 ≫... 예술작품은 그의 단 하나의 소통 창구인 걸까? 예술 작품은 진정으로 그의 창조자, 예술가를 대변할 수 있는 존재인가? 글쎄, 많은 예술가들이 창 작 노트 비스무리한 것들을 남겼고, 그리고 우리는 그 흔적들을 통해서 그의 삶을 엿본다. 고흐 의 작품 어디에도 그가 생활고에 시달렸다는 명증한 흔적 (물감이 부족해서 칠이 안된 부분이 있다든지, SOS 구조 요청 메시지가 적혀 있다든지)은 남아있지 않다. 반면 귀잘린 자화상은 분 명히 자기 자신에 대한 표현이자 고흐 삶의 특징적인 사건을 기술하고 있다. 즉, 어떤 의미에 서, 고흐는 작품을 통해 자신의 삶을 말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리고 본질적으로, 예술작품은 예술가를 대변할 수 없다. 필자가 예술작품의 대표성에 딴지를 거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예술 가의 삶 전체를 작품으로 환원(Reduction)하는 것은 동일하지 않은 것을 동일한 것으로 취급 하는 오류이기 때문이다. 모든 철학적인 문제제기가 으레 그렇듯, 당연하고 사소한 부분으로부터 예술가의 정체성을 규정할 만한 실마리를 찾아보자. 어떤 것의 정체성을 물을 때, 우리는 하나의 카테고리 (Categorie) 혹은 범주를 형성하는 무리지은 개체들을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을 하나로 묶을 만한 혹은 묶는 이유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이를 철학 용어로 객체의 속성 (Property)라 부른다. 사전에 모르는 단어를 검색 했을 때를 생각해보자. 크게 두 가지 이유로 우리는 사전을 검색한다. 무엇의 정확한 이름을 모르는 경우, 혹은 이름은 알지만 구체적으로 그 사물의 정의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경우. 우리 모두 예술가라는 단어를 들으면, 몇몇 사람들 을 떠올릴 수 있다고 해보자. 문제는 그 사람들을 하나의 그룹으로 규정할 만한 정의에 있다.


또 하나의 상습적인 표현을 살펴보자. ≪ 저 사람은 진정한 예술가가 아니야. ≫ 사람들은, 대 부분, 저마다 예술가와 일종의 모조 예술가를 구분하는 기준이 있는 것 같다(그것이 느낌이든, 유명도이든, 취향이든 간에). 다시금 중성적인 철학 용어를 빌어 표현하자면, 저마다 예술가라 는 하나의 카테고리를 형성하는 무리지은 개체 혹은 객체들에 대한 규준이 있다. “예술가 신체 의 물질,비물질성” 논문의 저자 강수미에게 예술가란, ≪ 대상으로부터 미적 관심을 발견하고 그것을 예술작품으로 현실화하는 주체≫ 이다. 풀어 설명하자면, 세상을 지각하고 해석하는 자 신의 방식과 관심을 하나의 물체로 빚어내는 (일종의 구체화 혹은 물질화 matérialisation)사람, 그리고 그것을 업으로 삼는 사람을 예술가라 지칭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때문에 예술가와 예술작품에는 분명한 인과관계가 존재한다. (즉, 그가 자신의 생각을 현실화하지 않기로 결정 하고 또 그렇게 행위했다면 예술작품은 물리적인 개체로서 존재할 수 없다. 즉 예술작품은 말 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예술가의 신체가 예술작품으로 제시되는 예술 형식의 흥미로운 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자신의 몸을 하나의 작품으로 현실화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예술작품을 만든 예술가 자신이 바로 그 작품이라면, 둘 사이의 구분은 아주 모호 해진다. 주체와 객체 도식, 원인과 결 과의 도식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좀 더 풀어 보면 주체가 바로 자신에 의해서 객체화되고 객체가 곧 주체가 되며, 원인이 곧 결과가, 결과가 곧 원인이 된다. 즉, 우리는 지금 창조의 주체 와 그 창조물이 동일한 경우를 다루고 있다. 이 예술 형식에 대한 논제는, 따라서, 어떤 영구한 사물과 그의 개념에 대해 다루는 전통적인 방식으로는 해석될 수 없다.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는, 예술작품 (예술가)와 예술가(예술가 자신)가 맺는 새로운 방식의 역학 관계가 처해진, 상황 과 맥락에 대해서 다루어야만 한다. 단순하게 말하면, 새로운 형식에는 새로운 방식의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특정하고 싶은 이 예술 형식을 서양 회화 전통의 독특한 주제인 “누드”와 그의 예술규범을 통해 보는 순간, 이 형식의 의미는 사라진다. 우선 이 형식과 주제를 “벗은 몸으로 나타나는 예술가”라고 명명해보자.


첫째, ≪벗은 몸으로 나타나는 예술가≫는 예술가가 자신의 신체를 직, 간접적으로 제시하거나 혹은 재현하는 예술 내의 상황이다. 이때의 신체란, 플라톤적 의미에서 유배된 영혼의 안타까 운 기거처가 아니다. 파편낼 수 있는, 조각내어 다시 끼워맞출 수 있는 모듈같은 존재도 아니 다. 즉 데카르트적 의미의 신체 기계가 아님을 밝힌다. 이때의 신체 즉 몸이란, 세상에 어쩔 수 없는 흔적을 남겨가며 생존을 거듭해 나아가는, 바로 그 과정으로 인한 역사가 새겨진 몸이다. 그렇다면, 이와 반대되는 경우도 있을까? 예술가가 자신의 몸을 나타내되, 존 버거의 말 처럼 2 그 몸이 하나의 복장 형식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있을까? 몸. 우리가 매일 쓰고 돌보고 가꾸는, (가끔 상처내기도 하는) 몸에 대한 재현의 역사는 유구하다. 예술사, 아니 인간의 모든 역사와 지적 호기심, 혹은 욕구는 모두 몸에서 출발한다. 그 몸은 언제나 다른 몸들에 둘러싸인 몸이 다. 즉, 환경 없이 존재할 수 없는 몸이다. 사람에 따라, 장소에 따라, 시대에 따라 몸은 다른 방 식으로 지각되어 왔다. 몸이 가지는 의미 또한 변해왔다. 벗은 몸도 마찬가지요, 무엇이 벗은 몸인가에 대한 의미도 마찬가지다. 본고에서 다루고자 하는 “벗은 몸”이란 실오라기를 걸치지 않은 몸이 아니라, 재현의 옷을 벗고 현전하는 대체불가능한 유일한 실체에 대한 표현을 지칭 한다.


게릴라 걸스의 유명한 포스터가 시사 하듯, ≪ 여성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들어가기 위해서 는 발가벗어야 하는가?≫... 고대 그리스 시절을 제외하면 서양 미술사에서 누드 형식은 마치 여성 신체의 전유물인 것 같다. 그렇다. 본 칼럼은 아트팩트 팟캐스트 같이 읽기 “존 버거, 어떻 게 볼 것인가” 의 논의를 확장한 글이다.


누드에 대한 기념비적인, 그리고 아주 전통적인 시각에 입각한 영국의 미술사학자 케네스 클라 크의 설명에 따르면, 누드는 기원전 5세기 그리스인들이 고안해 낸 미술 형식이다. 그에 따르 면, 볼품없고 가엾은 인체를 신이나 가질 법한 아름다운 신체로 이상화한 것이 누드의 출발점 이라고 한다. 즉 그리스 예술가들이 인간의 벗은 몸을 재현의 과정을 거쳐서 물질화한 이유는, 여기 존재하는 평이하고 그저 그런 몸을 (신성하리만치 아름다운) 이상적인 몸으로 탈바꿈하 여 불완전한 존재를 완벽한 것으로 만드는 데에 있었다. ≪ 철학자의 영혼은 육체를 극도로 멸 시한다. ≫ 기원전 5세기 철학자의 육체를 바라보는 이 냉정한 시선은 비단 플라톤만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시각은 시대의 변천을 거쳤다고해서 딱히 사라지지는 않았 다. 몸에 대한 플라톤적 시선을 가진 사람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어쨌든 여기에 두 가지 몸에 대한 카테고리와 그리스 예술가의 정체성이 존재한다. 여신 비너스의 몸과 사람의 신체. 그렇 다면 예술가는 사람을 신으로 빚어내는 존재다.


르네상스 시대. 만물의 영장이 인간이 되고 거장들의 천재적인 시선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는 시대로 접어들면서, 예술가의 미적 관심이 되는 대상은 여전히 동일하지만, 그가 대상을 바라 보는 시각은 완전히 달라진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신으로부터 인간이 세계의 주체로서의 권위를 계승하는 순간을 그린 이 작품이 증명하듯, 이제 인간 그 자체가 신적인 존재가 되었으 므로 재현된 몸과 예술가 간의 위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재현된 몸은 예술가와 무 3 엇보다 관람객을 위해 존재한다. 미술작품은 신전이나 성당의 소유물이 아니라 개인의 사유재 산이 되기 시작하고, 구매자의 “니즈”를 충족하는 방향으로 변화를 거듭해 나아간다. 특히나 근대 예술가의 “비즈니스”에서 “누드”는 가장 잘 팔리는 상품 중 하나였다. 대관절 벗은 몸을 그리는 것과 흥행성이 예술가의 정체성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 물으실 수도 있겠다. 존 버거는 말한다. ≪ 화가가 벌거벗은 여성을 그린 이유는 벌거벗은 그녀를 바라보는 것이 즐거웠기 때 문이다. (페이지 64쪽)≫ 한 가지 이유를 더 추가하고 싶다. 잘 팔리기 때문이다. 좀 더 중립적 으로 표현하면 누드에 대한 시장의 수요가 활달 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예술가는 예술 작품을 생산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사람이며, 시대와 구매자의 취향은 이 직업 카테고리에 속 하는 개체들과 무관하지 않다.


19세기에 접어들면 마네의 올랭피아처럼, 회화의 전통적인 형식체계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던 지는 작품들이 등장한다. 물론, 벗은 몸이 어떻게 전시되고, 소비 되는지, 혹은 주체에 있어 몸 이란 무엇 인가에 대한 실존적인 고민이 일어나기 한참 전의 일이다. 여전히 예술가의 신체는 논의 바깥에 있었다. 다시 말해, 마네의 올랭피아는 누드화라는 형식적인 규범에 대한 한 예술 가의 반발이자 새로운 형식 패러다임에 대한 제시였지만, 누군가의 알몸을 전시하는 것에 대 한, 즉 어떤 주체를 대상화하는 것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는 작품은 아직 아니었다. 예술 작품과 예술가 사이에는 주체와 대상이라는 견고한 이분법적 관계가 존재했으며, 이것을 허무는 ≪ 벗 은 몸으로 나타나는 예술가 ≫ 형식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해체적 시선이라는 새로운 방식의 지각이 필요했다. 새로운 방식의 지각은 새로운 방식의 사유이기도 한 것이다.이제 어떤 벗은 몸이 대상화과정을 거치지 않고 나타나기 위해서 어떤 조건들이 있으며 이를 해체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새로운 사유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어떤 헐벗은 몸이 하나의 살아있는 전체성의 표현으로 나타나기 위해서, 우리가 필요한 것은 이상화, 일반화, 추상화, 장식화, 대 상화, 소유재산화의 해체다. 풀어서 나열해보자.


신성화 되지 않은 몸.

한 개체의 유일한 몸.

언어적 질서로 개편되지 않은 신체적 질서.

규범을 입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몸. 조각나지 않은, 외부에 의해 부분이 강제로 바꿔치기 되지 않은 전체로서의 몸.

타인의 시선에 비춰 재구성한 몸이 아닌, 더듬어가며 확인하는 몸.

능산적 자연과 살갗을 맞대는 몸. 고독하게 동떨어지지 않는 몸. 관계를 맺는 몸.



Paula Modersohn-Becker, Autoportrait (1906), 62,2 × 48,2 cm, Brême, musée Paula Modersohn-Becker.


파올라 모더존 베커(Paula Modersohn-Becker)는 서양 미술사를 통틀어 최초의 누드 자화상 을 그린 여성 화가다. 이 예술가에게 자신의 벗은 몸을 그린다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1879년 태어나 1907년 그가 짧은 생을 마칠 때 까지, 이 젊은 독일 표현주의의 선구자는 1800여 점의 작품을 남겼다. 호박 목걸이를 한 자화상, 1906년 작을 보라, 모두가 들판의 풀처럼 꽃처럼 헐 벗고 무심하게 서로 함께 어우러져 있는 광경을. 그 속에는 상징으로 감싸인 몸도, 어떤 규범에 대한 반발도, 어떤 대상화도 없다. 풀내음 가득한 그림 속에 그녀는 여기, 다른 무엇으로도 환 원될 수 없고 대체될 수 없는 몸으로, 다른 몸들 속에 한데 어우러져 있다. 거친 붓질로 더듬어 드러내기,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온전히 드러내기, 다른 몸들과 함께 하는 몸 자체를 온 전히 드러내기. 지각된 것이 아니라 지각하는 행동의 주인공. 그리고 행위하는 그 자신 자체에 대한 ≪살아있는 전체성의 표현≫.(다음 칼럼에 계속)





참고 문헌

Kang, Su-Mi (Seoul National University Institute of Humanities), On the non/material Dimensions of Artist’s Body,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