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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여성, 나혜석

7월 3일 업데이트됨

w. 송현주 Hyunjoo Song



예술은 시대를 반영한다. 그리고 예술은 특정한 시대 속에서 작가의 일생을 반영하기도 한다. 1988년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3월을 ‘여성 역사의 달’로 지정하였다. 오늘날 3월은 전 세계에서 3월 8일 국제 여성의 날을 기념하며 여성에 대한 사회적, 정치적, 역사적 논의를 다루고 있다. 이번 3월 칼럼은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그녀의 삶 자체로 이슈가 되었던, 나혜석에 대해 다룰 것이다. 나혜석의 작품을 통해 그녀가 평생 꿈꾸었던 자유로운 여성으로서의 삶을 반영하고자 한다.


이미 많은 논문, 칼럼, 다큐멘터리 등을 통해 나혜석의 생애와 그녀의 행보는 잘 알려져 있다. 나혜석에 대해 관심을 두게 된 것은 그녀의 생애보다 그녀의 작품에 더 집중하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라는 수식어를 가진 나혜석은 처음으로 일본에서 미술 유학을 한 조선 여성이다. 당시 한국의 미술은 유화가 본격적으로 도입되던 시기로서, 일본의 외광파와 유럽의 인상파의 화풍을 특징으로 한다. 나혜석이 작가로서 활동하던 1920년대 한국 화단은 일본에서 공부한 화가들이 많았다. 그리고 이들은 당시 일본에서 유행하던 프랑스 살롱의 후기 인상주의에 그대로 영향을 받아 한국적 아카데미즘을 형성하였다.


나혜석이 그린 두 풍경화는 이러한 화풍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그녀가 1922년에 그린 <농촌 풍경>[도판 1]은 나혜석의 초기 화풍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목가적인 농촌을 소재로 하여 당대 농촌을 재현하고 있으며, 향토색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나혜석의 초기 화풍은 유학 시절 도쿄 여자 미술 학교에서 일본 관학파의 영향을 받았으며, 후기 인상파의 특징 또한 나타난다. 이후 나혜석은 남편을 따라 1년 8개월 동안 유럽과 미국을 여행한다. 특히 파리에서의 8개월간 체류 과정은 훗날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는 계기가 된다. 파리에서 자유분방한 연애를 꿈꾸었던 그녀의 사생활도 파격적이지만, 그녀가 프랑스 생활을 하며 느꼈던 개인에 대한 고찰과 예술에 대한 의지 또한 주목할 만하다. 나혜석은 8개월의 시간 동안 파리에 머물며 랑송 아카데미(Académie Ranson)에서 수학했다. 랑송 아카데미의 교수진은 입체파 운동의 선구자였던 페르낭 레제(Fernand Léger)와 앙드레 로테(André Lhote) 등이었으며, 나혜석의 화풍 또한 변화하는 전환점이 된다. [도판 2]


1. 나혜석 Hye-suk Nah, <농촌 풍경>, 캔버스에 유채, 27.5 x 39 cm, 1922.

2. 나혜석 Hye-suk Nah, <파리 풍경>, 캔버스에 유채, 23.5 x 33 cm, 1927-28.


나혜석이 파리에 있을 당시 그린 <자화상>[도판 3]은 그녀의 변화를 더욱 잘 반영하는 작품이다. 나혜석의 자화상은 이 시기 한국 여성 작가가 그린 유일한 자화상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그림 속에서는 나혜석은 한복이 아닌 보라색 드레스를 입고, 머리 또한 짧다. 미술 평론가 윤범모는 그녀의 자화상이 ‘배경을 단색으로 처리하여 주인공의 성격 묘사에 집중하였음을 알 수 있고, 그녀의 강인한 성품과 자존감을 드러낸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황금기라고도 할 수 있는 시간 속에서 그녀의 자화상은 어둡고 외로운 느낌을 들게 한다. 1년 8개월간의 여행 후 고국으로 돌아온 나혜석은 자신의 기행기에 조국에 대한 양면적인 감정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조선 오니 길에 먼지가 뒤집어씌우는 것이 자못 불쾌하였고 송이버섯 같은 납작한 집 속에서 울려 나오는 다듬이 소리는 처량하였고 흰옷을 입고 시름없이 걸어가는 사람은 불쌍하였다.’ [1]이를 통해 그녀가 경험한 신문물에 대한 동경과 그녀의 현실에 대한 아이러니가 나혜석의 이후 작품 활동에 꾸준히 영향을 미치는 것을 알 수 있다.


3. 나혜석 Hye-suk Nah,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62 x 50 cm, 1928.

4. 나혜석 Hye-suk Nah, 1920년대의 나혜석 사진.


나혜석의 진보적인 삶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고도, 그녀를 한국 미술의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뽑을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물음은 나혜석이 1922년부터 1932년까지 총 18번 동안 조선 미술 전람회에 입선하였다는 것만으로도 작가로서의 그녀의 위치를 말해준다. 조선 미술 전람회는 일제 강점기에 개최된 이른바 작가 등용문으로서, 1949년부터 시행된 대한민국 미술 전람회의 모태이다. 특히, 이혼 후 위자료 한 푼 받지 못하고 생활고에 시달리던 나혜석은 1931년 파리의 클뤼니 중세 박물관 (Musée de Cluny)에 전시된 생 제르망 성당의 문을 그린 작품 <정원>[도판 6]으로 제10회 조선 미술 전람회에서 특선을 받게 되며 작가로서의 나혜석을 공고히 알리게 된다. 안타깝게도 작가로서의 재기 이후 나혜석의 집에 불이 나 대부분의 작품을 잃었고, 이 작품 또한 소실하였다. 이혼 후 재기를 위해 그렸던 작품에서도 그녀가 동경하고 그리워했던 곳을 그렸다는 것이 작가의 순수한 열망을 보여준다.


미술사학자 윤난지는 저서 한국 현대 미술의 정체에서 나혜석 작품에 대해 ‘시대적 조건을 넘어서려는 여성으로서의 자의식이 감지된다’고 표현하였다. 나혜석의 작품 속에서 읽어낼 수 있는 주체로서의 이미지는 그녀 개인의 자의식뿐만 아니라, 당대 여성들의 자유에 대한 갈망을 담고 있던 것은 아닐까.


5. 나혜석 Hye-suk Nah, <농가>,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 입선작, 캔버스에 유채, 1922.

6. 나혜석 Hye-suk Nah, <정원>,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 특선작, 캔버스에 유채, 1931.

(일본제국미술원전람회 입선)




[1] ‘조선 오니 길에 먼지가 뒤집어씌우는 것이 자못 불쾌하였고 송이버섯 같은 납작한 집 속에서 울려 나오는 다듬이 소리는 처량하였고 흰옷을 입고 시름없이 걸어가는 사람은 불쌍하였다.’ (‘아아 자유의 파리가 그리워’ 『전집』 pp.318-319. 初出 『三千里』, 1932年1月)



참고 자료

윤난지. 한국 현대미술의 정체 (The Identity of Korean Contemporary Art), 한길사, 2018, p. 135.

김화영. "나혜석의 『자화상』과 ‘조선’-일본과 서양의 여성 화가의 자화상의 비교를 통하여." 일본근대학연구0.24 (2009) : 107-117.

구정화. 1920년대 나혜석의 농촌 풍경화 연구. 미술사논단, (31) (2010), 147-168.

서은아. "신여성 나혜석의 근대적 자아정체성." 국내석사학위논문 연세대학교 대학원, 2006.

임창섭. "한국 근대미술의 인상파 도입 과정과 아카데미즘 형성에 관하여", 조형예술학연구, 한국조형예술학회, 2006, pp. 89-115.

한국사전 59회 – 나는 말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나혜석 (2008.10.11.방송)

https://www.youtube.com/watch?v=VuHr0OdGFjg


도판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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